내가 살던 동네는 ‘송가니(Songani)’라는 지역과 ‘도마시(Domasi)’라는 지역 사이에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송가니에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가장 큰 마을 시장이 었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장날이 열렸다. 그리고 내가 살던 지역은 말라위가 영국 식민지 시절 때 스코틀랜드에서 온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교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 이름은 아직도 ‘CCAP(The Church of Central Africa Presbyterian; 아프리카 내 장로교회파)’로 불린다.
CCAP로 가기 위해서 는 송가니 시장 입구 한 켠에 난 여러 가지 샛길 중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 서 약 5km정도를 걸어서 산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CCAP를 따라 올라가는 길에 다양한 마을을 지나간다. 송가니 입구에서부터 음두무(Mdumu), 음고볼라(Mgobola), 음폰다(Mponda), 마콰와(Mkwawa), 은괄레(Ngwale) 마을 등을 지나서 쭉 올라가면 CCAP가 나온다. CCAP에서 내가 일을 하는 지역학습센터로 가기 위해서는 은괄레 마을을 향해 가는 지름길을 따라서 마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매일같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다보니, 누가 어디에 사는지 더 알기가 쉬 웠다. 지나다니면서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은 흔한 일상의 일부였다. 말라 위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주민들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치체와(Chichewa; 현지 어)가 인사말이었다. 말라위는 오전, 오후에 하는 인사말이 조금 다르다. 인사 말도 상대가 가까운지 먼지에 따라서 조금 표현이 다르다. 초반에 나는 긴 말 은 익히지 못해서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 많이 쓰는 “Bho!(안녕!)”를 외치고 다녔다. 만약에 내가 그 뜻이 때로는 무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내가 할머니와도 또 동네 아저씨에게도 그렇게 인사를 하자, 나에게 나무라기보단 그저 웃으며 답해주셨다. 내가 말을 끝낼 때 마다, 나와 함께 동행하시던 촌장님이나 마을 교사들이 동네 주민들에게 뭐라고 했는데, 아마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뒷수습을 하셨던 것 같다.
아마 ‘쟤가 처음 와서 그런데 이해 좀 해주세요!’라고 하셨겠지?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온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내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어느 동네이던지 아이들이 길가로 달려 나와서 나를 반겨주곤 했다. 나의 이런 점을 촌장님들과 우리 센터 교사들은 매우 좋아했 다. 나중엔 어르신들에겐 당연히 존칭으로 인사를 드렸고, 아이들에겐 더 많은 “보!!”를 난발하였다. 난 그저 마을 사람들이 집 앞 마당에 둘러 앉아서 옥수수 낱알을 까면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들끼리 깔깔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고, 흙먼지와 모레를 옷에 뒤집어 쓴 아이들이 모래바람을 내면서 아주 큰 바오밥 나무 아래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팔고 있던 망고를 나에게 손에 쥐어주며, 걸어 올라가면서 먹으라고 주는 그 마음에 감동 받았고,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주고며 새 신발에 절뚝거리던 나를 구해준 아이들이 고마웠고, 새로 태어난 식구가 있다며 내 손을 끌고, 어둠 속 초가집 한 켠 막 태어난 새 생명을 보여주며 환하게 미소 짓는 아기 엄마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한번씩 도마시 입구에서 자전거 택시를 이용해서 우리 센터로 이동할 일들이 생겼다. 도마시 입구에서 리콘데(Likonde)마을을 지나서 우리 센터가 있 는 음리마(Mlima)마을로 이동을 하는데, 자전거 택시 기사들은 나를 태울 때 마다 항상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리콘데 마을에서부터 음리마 마을까지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하나!! 하나!!” 하며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다.
자전거 기사는
“아니, 어떻게 이 동네는 다 당신을 아는 거유? 하나! 하나!”
하면서 열심히 페달을 돌리며 말했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동네 주민들이 물을 받으며 나에게 건네는 인사, 자전거 기사의 땀 냄새를 중화(?)시켜 주는 살랑 살랑 부는 바람, 집에서 맨발과 아랫돌이만 걸친 채 나와서 손을 흔드는 3,4살 짜리 아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하다.
2014년에 한 두 달 정도 내가 살던 CCAP 게스트하우스에서 호주에서 자원 봉사를 온 17살 두 소녀 케일리, 크리스티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하루는 케일리와 크리스티가 시내를 갔다가 돌아와서는 나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 맞지?”
“응! 내 이름 몰랐어?”
“아니, 알고 있었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오늘 시장 입구에서 마을 지나서 집으로 오는 내내 동네 아이들이 나와서 ‘하나, 하나’ 하길래! 너 정말 마 을에서 유명하구나!”
“하나!”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아이들. 이 맛에 내가 마을에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얼굴이 하얀 외국인이 지나가면, 다 ‘하나’라고 불렀다. 내 동생이 놀러 왔을 때에도 동생을 보곤 나와 쌍둥이 아니냐면서, “하나 아위리! (Hannah Awiri!, 하나가 둘이야!)를 외치곤 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아는 것은 스트레스일 때도 있다. 마을 센터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거나, 유독 체력적으로 지쳐있거나, 이미 많은 아이들과 놀다 온 후에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일 때,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면 정말 피곤할 때가 있다. 내가 어딜 다녀 왔는지, 뭘 했는지, 언제 자기 집에 놀러 올 것인지, 오면 뭐 먹고 싶은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내 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사진을 막 찍어달라고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을 보면 어쩔 땐 찍지도 않으면서 찍어주는 척을 하고 빨리 상황을 마무리 할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마주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나의 머리 속에는 주민들과 아이들의 환한 미소, 그 리고 ‘하나!’하고 나를 불러주던 모습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