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는 후회와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우울은 과거를 후회해서, 불안은 미래를 걱정해서 생긴다고 한다. 나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자주 후회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늘 두려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과거를 컴퓨터처럼 깨끗하게 포맷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마음에 남은 상처 모두 말끔히 지워져 더는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은 지극히도 연약했다. 학창 시절에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상처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누군가 지나가며 던진 말과 시선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갈 때면 상처가 오래 곪아 영원히 흉터로 남았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과 시선이 두려웠고 다치지 않으려면 방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내 속의 못나고 나약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했다. 세상은 믿음과 포용이 아니라 경쟁과 생존의 공간이라 믿었기에 조금만 틈을 보이면 공격당해 무너질 것 같았다. 늘 완벽해야 하고 절대로 적을 만들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모두에게 사랑받아야만 했다.
실패가 두려웠다. 아니 실패해서 나약해진 나를 보는 게 두려웠다. 실패한 나를 두고 수군거릴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남들보다 많이 뒤처져서 결국 세상에서 아웃당할 것 같았다. 사회에 나가 만난 선배들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결과로 보여주지 않으면 열심히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실수도 실패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앞자리에 서고 싶었다. 그래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쉬운 일에만 도전했다. 실패할 것이 뻔해 보이는 어려운 일은 처음부터 마음을 접었다.
거절도 잘하지 못했다.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싫은 소리를 해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와 대차게 싸워본 적도 없다. 기분이 나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면 그걸 지적해서 서로 감정이 상하느니 차라리 내 쪽에서 마음을 접는 것이 훨씬 편했다.
우울 증세가 보이기 시작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살아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업을 골라 들었다. 자신 있는 과목을 들으니 자신감도 생기고 성적도 잘 받았다. 교수님께 칭찬도 받았다.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쉬웠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불편해도 일주일에 고작 두세 번만 만나면 되니까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취업을 하면서 시작됐다. 대학에서도, 아르바이트와 인턴으로 일 할 때에도 일 잘한다는 칭찬만 받던 내가, 여기저기서 지적받고 혼나며 뭐 하나 잘하는 것 없는 무능력한 신입사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첫 번째 직장에서 겪었던 건 분명 우울증이었다. 모두가 선망하고 연봉도 높은 대기업에 합격했다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취업하기 위해 자기소개서와 면접에서 마음이 단단한 척 연기했던 것이 문제였다. 진짜로 마음이 튼튼했던 동기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을 나는 늘 힘들어했다.
내가 다녔던 백화점은 내가 속한 지점뿐 아니라 본사, 전국 모든 지점의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함께 일하는 직원만 해도 수십 명, 매일 웃는 낯으로 대해야 하는 고객은 수백 명이었다. 이 모두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어쩌면 이룰 수 없는 목표였다. 그걸 지키려고 부단히 에너지를 소비했다. 항상 '죄송합니다', '부탁합니다', '제가 부족해서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무례한 고객에게도 머리를 숙였다. 신입사원이라 여기저기서 속출하는 부탁을 거절하지도, 다른 직원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나는 남들보다 늘 일이 많았고 그래서 늘 억울했다.
마음의 화병은 분노가 되어 애꿎은 가족을 공격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상스러운 욕을 자주 내뱉었다. 그래야만 화가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휴무일에 버스를 타고 회사 주변을 지나갈 때면 숨이 가빠오거나 눈물이 흘렀다. 나를 괴롭히는 미운 상사 얼굴이 갑자기 떠오르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발작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줬다.
급기야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교통사고가 난다면 회사에 출근 안 할 수 있겠지?'란 생각까지 하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험 신호였다. 본능이 내게 벗어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대기업 마케터라는 직업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숨쉬기 어려운 드레스 같았다. 몸에 맞지 않는 드레스를 벗고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기로 결심했다.
이직하면 모든 게 나아질까
그렇게 이직한 두 번째 회사는 로펌이었다. 나는 대형 로펌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전 직장인 백화점에 비해 직원 수가 현저히 적어서 내가 눈치 볼 사람도, 내게 부탁할 사람도 많지 않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내가 기획하고 예산을 받아 직접 수행하고 매출을 일으켜야 하는 마케팅 일과 달리, 정해진 절차에 따라 놓치지 않고 잘 해내기만 하면 되는 비서 일은 훨씬 수월했다. 시키는 일을 절차 대로만 하면 되니 실패할 일이 없었고, 창의력보다 성실함이 더 중요한 일이라 스트레스가 덜했다.
하지만 5년 차가 되던 해, 나는 내게 맞지 않은 직업을 또다시 선택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전 직장에서 겪었던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어김없이 언행은 거칠어졌고 사람들이 미워졌다. 내가 의지하는 몇몇 동료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나를 이용하려 드는 것만 같았다.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나는 심지어 지하철을 환승하러 가는 길에 내 몸을 밀치고 앞서간 행인에게도 불같이 화가 났다. 숨은 자주 가빠왔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눈물이 터져 서럽게 우는 날이 반복됐다.
상태는 전보다 조금 더 심각했다. 예전에는 분노와 슬픔의 감정이었다면 이번에는 무감각과 무욕구의 상태가 된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어도 예쁜 곳에 가도 재밌는 프로그램을 보아도 나는 아무런 감정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웃어야 할 것 같은 상황인 것 같아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을 뿐 딱딱하고 차갑게 냉동된 내 마음은 좀처럼 해동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배들의 조언은 대부분 비슷했다. 갓 결혼한 내게 출산을 권유했다. 아이를 낳고 적당히 일하다가 그만두고 가정주부가 되는 루트가 최고라고 했다. 결혼도 했으니 이제는 일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지 말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나 취미 생활에서 의미를 찾아보라고도 했다. 모두 좋은 말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원했던 조언은 아니었다.
명상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았다. 하는 동안은 평화롭고 좋았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마음을 잘 다스려놓아도 회사에 출근하기만 하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일을 당장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는 건 리스크가 컸다. 이 상태에서 백수로 지낸다면 우울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첫 번째 이직 때 그랬듯 직업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서른두 살 유부녀가 직업을 바꿔 신입으로 취업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두려웠다. 첫 번째 이직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고 나니,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두 번째 선택은 신중해야 했다. 그러니 더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 섣불리 도전했다가 또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 무기력하게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 내게 한 줄기 빛처럼 나를 구원해줄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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