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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30. 2022

사회 불안, 너였구나

첫 심리 상담의 시작을 시작하다


"임직원 여러분의 업무 스트레스 경감을 위한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 개설되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는 메일을 보자마자 이런 걸 누가 하겠냐며 혀를 끌끌 찼지만 나는 달랐다. 본능적으로 나를 살려 줄 동아줄임을 알아챘다. 이제는 직원들의 시선 따위 두렵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 조용히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들어올까 무서워 문을 잠갔다. 심호흡을 길게 한 번 한 뒤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두 번쯤 들렸을까. '안녕하세요. 00 상담센터입니다'라는 인사말이 들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금 우울 증상을 겪고 있고 될 수 있으면 빨리 심리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일정을 확인하더니 당장 이번 주는 어렵고 다음 주에는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가능한 날짜 중에서 제일 빠른 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한 번 더 생각하거나 지체한다면 결국 이 기회마저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 용기 낸 행동 하나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첫 심리 상담의 시작


2018년 4월 6일 금요일 오후 8시 10분. 내 인생의 첫 심리 상담이 시작된 날이다. 막상 예약한 날이 되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고작 이런 가벼운 증상으로 상담을 받으러 왔느냐고 하면 어쩌나, 혼자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문제를 심리 상담까지 받으려 한 건 아닐까, 너무 섣부른 결정은 아니었나 하는 걱정이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급한 야근이 생겨 애써 잡은 상담 예약을 미루게 될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저녁 6시. 다행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남은 일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분주하게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껴서 지하철을 타고 상담센터가 있는 남부터미널역으로 향했다. 출구 밖으로 나서자 살짝 차가운 4월의 봄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사무실에서 내내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진 걸까.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을 생각에 살짝 긴장되면서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하고 또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식사는 하셨나요?"


선생님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공손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친절함이었다. 상담실에는 내담자인 내가 앉을 푹신하고 큰 소파와 선생님이 앉는 작은 의자가 마주 보고 놓여 있었다. 한쪽 벽에는 컴퓨터 책상이, 다른 한쪽에는 심리학 전공 서적들이 책장에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따라 나의 상황을 하나둘씩 꺼내어 설명해 드렸다. 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불안과 분노이고 무기력감을 느끼며 어떤 것을 보고 먹고 사고 경험해도 흥미롭지가 않다고 말했다. 자주 피곤하고 졸리며 에너지가 항상 바닥나 있고, 스스로가 무가치한 사람인 것 같아 자존감도 계속 떨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내게 영향을 미친 과거의 경험들을 설명하려면 살면서 불쑥 떠올라 나를 자주 괴롭혔던 기억을 다시 소환해내야 했다. 그리고 애써 모른 척했던 내 감정을 단어로 구체화해서 말로 뱉어내야 했다. 단지 '싫었다', '힘들었다', '화가 났다'처럼 뭉뚱그려 대신할 수 있는 단어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내가 느낀 절망감, 서러움, 속상함을 잘 나타내 줄 단어를 골라야 했다.


사실 나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라서 내 말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내 감정을 횡설수설하지 않고 잘 전달하는 일이 어려웠다. 생각하고 말하느라 말을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하는 속도도 더뎠다.


그러다 보니 50분의 상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우려한 것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감정과 생각을 살짝이라도 털어놓으니 조금은 후련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50분씩 2주마다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정말 나아지긴 할지 걱정도 됐다.




위험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


상담을 마칠 무렵 선생님은 더욱 정확한 상담을 위해 세 가지 검사를 진행할 것을 권하셨다. 우울 정도를 측정하는 BDI, 개인의 성격이나 심리적 상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MMPI-2, 기질 및 성격을 확인하는 TCI 검사였다. 다음번 상담 시간에 결과를 설명해주겠다고 하시며, 결과는 앞으로 상담 진행에 참고하겠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와 주말 동안 정성껏 검사지의 문항을 읽고 솔직하게 체크했다. 문장을 완성하는 BDI 검사를 할 때는 조금 어려웠다. 객관식 문항 중에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적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을 마주할 때면 곧바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오래 고민하기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너무도 궁금했기에 어느 검사 하나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2주가 다시 흐르고 두 번째 상담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타고나기를 불안 기질이 높은 사람이고 심각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사회 불안 증세가 보인다고 했다. 사회 불안(social anxiety 또는 social phobia)이란 사회적 관계나 상황에서 심한 공포나 불안을 느끼는 증상으로, 타인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시험이나 발표, 면접 등과 같은 상황에서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클라크와 웰스(Clark & Wells, 1995)의 사회 불안 장애 인지 모델(Cognitive model of social phobia)에 따르면, 사회 불안을 겪는 사람들은 세 가지 역기능적 신념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나는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수행에 대한 과도한 기준이고, 두 번째는 '내가 실수할 경우 타인이 나를 무시할 것이다'라는 사회적 평가에 대한 조건적 신념, 마지막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하다'라는 자신과 관련된 부정적 신념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세 가지 신념을 모두 갖고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지금까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이 증상들이 모두 사회 불안 증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는 위험회피도 점수에서 100점 만점 중 100점을 맞았는데, 다른 것도 아닌 여기서 100점을 맞은 내가 웃기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그동안 돈 모을 때도 무조건 적금만 들고, 창피를 당하거나 실패할 것 같은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무너질까 덜덜 떨던 내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울과 불안을 낮추기 위해 같이 노력해보기로 선생님과 약속했다.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치료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지 행동 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였다. 생각이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면, 내 생각이 불안을 만들어내고 그 불안이 형체 없는 또 다른 불안을 만들고 있다면,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를 생각하며 사고를 현재로 되돌리는 방식이다. 또 다른 방법은 노출 치료(Exposure Therapy)였다. 노출 치료는 불안을 유발하는 환경에 자신을 계속 노출함으로써 그 환경이 어떤 위험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갖도록 해준다.


심리 검사를 받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안도감도 든다. 나는 혹시나 심리학의 대가들이 만든 검사조차 밝혀내지 못할 정도로 내 성격이 특이해서, 심리학 연구 대상으로 선정되어 재검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떡하나 살짝 걱정했는데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가진 문제는 감기와 같았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겪어와서 이미 치료법까지 밝혀진 아주 평범한 증세였다.


전문가에게 '너는 정상적인 사람이고 네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정상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보기만 해도 짜증 나고 외면하고 싶던 꼬인 실타래가 안쓰럽고 잘해주고 싶은 대상이 된다, 


'실타래야, 꼬여 있는 너도 얼마나 답답하겠니. 오래 걸리더라도 내가 지금부터 천천히 하나씩 풀어줄게.' 


나는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앞으로 잘해보겠다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과 나눈 대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재이 님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생은 무엇인가요?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선생님이 던진 질문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저는 무슨 일이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저는 제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서 생각해보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원하는 바에 부합할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변호사님들 앞에서 늘 주눅 들었다. 이상한 지시를 받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무력감을 느꼈다.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비서의 일이기에, 내 의견을 당당하게 내기보다는 상사의 의견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덕목이었다.


내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끔 가치관에 반하는 사건을 담당 변호사님이 맡게 될 때면 그 일을 도우면서도 마음이 늘 불편했다. 그러니 어디 가서 내 일을 자신 있게 소개하지도 못했다. 내 일이 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로펌 비서라는 직업이 부끄러운 직업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로펌에는 자부심을 느끼며 당당하게 일하는 비서들과 스태프들도 많다. 다만 나라는 사람이 로펌 비서라는 일을 그들만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대학원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걸 좋아하고, 글을 쓰고 공부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쏘 변호사님들이 4~5년 차 정도가 되면 해외로 유학을 가는 모습을 보면서 늘 부러웠다. 변호사님들의 대학원 진학을 위한 서류를 챙기면서 '나도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애써 꾹꾹 눌렀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박사 과정을 밟은 후 연구원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현실적인 제약이 없다면 유학을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외에서 살면서 원 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삶.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전공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내 전공인 경제학은 딱히 흥미도 재능도 찾지 못했으니 일단 패스. 심리학에 관심이 많으니 심리학을 전공할까 고민했지만 나부터 마음이 단단하지 않은데 내담자의 마음 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때 마침 미래에는 사회복지 분야가 유망하다는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북유럽 복지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도 조금씩 생겨났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부합하는 것도 같았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고 이쪽 분야에서 이름난 국내 대학원들의 입학 요강을 살펴보니 입시 시험과 별개로 모두 영어 성적을 필수로 요구하고 있었다. 토익이나 텝스 성적도 받고 있었지만 나는 왜인지 모르게 토플을 하고 싶었다. 입학하게 된다면 영어로 작성된 논문을 읽어야 할 텐데, 토익에서 배운 단어들로는 논문을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입학해서 고생하느니 지금 미리 공부해두는 것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 같았다.


문제는 내가 토플 공부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험 과목도, 시험 시간도, 시험 비용도 전혀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이렇게 오래 걸릴 시험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식하고 용감하게 시작한 토플 공부가 나의 불안과 우울을 치료해주는 과정이 되어 주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토플 공부를 하면서 인지 행동 치료와 노출 치료의 성격을 가진 시도들을 조금씩 하게 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불안과 우울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토플 공부 덕분에 사회복지학이 아닌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출판번역가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정말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2018년 4월의 나는 2022년 10월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결코 지울 수 없는 엉망진창인 과거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꽤 괜찮은 과거를 만들어 덧대어 보기로 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가 되고, 미래는 늘 현재의 모습을 하고 온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뿐이다.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 P.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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