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연 Oct 30. 2022

처음 맛본 완주라는 기쁨

토플 학원을 등록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토플 수업을 듣던 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선택한 곳은 강남역 P 어학원이었다. 강남역은 유명 어학원들이 몰려있기도 하지만 위치적으로도 최적의 장소였다. 회사에서 가까워서 일이 살짝 늦게 끝나더라도 수업에 많이 늦지 않을 수 있고, 신분당선 역이 있어서 수업이 늦게 끝나더라도 집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4월 15일에 수강신청을 한 후 보름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 오후 6시 45분 수업을 듣기 위해 일을 마치고 서둘러 강남역으로 향했다.


사실 취업을 준비하던 7년 전, 종로에 있던 토익학원을 다녔던 이후로 어학원에는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 취업했기 때문에 더는 토익 점수가 필요하지 않기도 했지만, 유명한 강사의 강의를 듣기 위해 긴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강의실 뒤편에 겨우 앉아 열심히 필기하며 공부했던 순간이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학원을 생각하면 즐거움보다 고통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퇴근하기 위해 지하철로 향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어학원에 도착하는 기분은 썩 괜찮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퇴근 후 시간에도 쉬지 않고 공부하려는 내가 조금은 멋져 보이기도 했다.


강의실 문을 여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학생 몇 명이 보였다. 비어있는 자리가 많은 걸 보니 아직 다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호기롭게 맨 앞자리에 앉았다. 뒤쪽에 앉으면 강사님도 화면도 잘 보이지 않아서 집중력이 금방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호기로움에서 절망으로


한 열 명쯤 찼을까. 수업이 시작됐다. 둘러보니 나 빼고 모두 대학생인 것 같았다. 학생들과 수업을 같이 들으니 조금은 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오래전이지만 취업 준비생 시절 봤던 토익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어학연수를 할 때는 원어민에게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들었던 터라 낯선 시험이긴 했지만 그리 많이 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났고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서 몰래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도 창피해서 가능하다면 책상 밑에 숨고 싶었다.


첫 수업은 리딩 과목이었다. 곧바로 단어를 테스트하는 쪽지 시험지를 나눠 주셨다. 처음 온 학생들은 부담 갖지 말고 아는 단어만 쓰면 된다고 했다. 나는 한 단어도 쓸 수 없었다. 아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첫 수업이니까 다음 시간에는 단어를 외워오면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낙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분간 교재에 있는 문제를 푸는 시간을 가졌는데 지문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일 뿐이었다. 단어는 물론이고 문장 구조와 지문 자체의 난이도는 토익에서 보았던 리딩 지문과는 전혀 달랐다. 토익이 라면의 순한 맛 같았다면 토플은 매운맛 그 자체였다.      


리딩 지문에 호되게 데고 숨 쉴 틈도 없이 리스닝 수업이 시작됐다. 어린 시절부터 리스닝 영역이 리딩보다 성적이 더 좋았기 때문에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들리겠지'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강사님이 문제를 재생하자마자 내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력은 있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헬렌 켈러가 된 것 같았다. 스스로가 너무나 바보 같아서 지문이 음성으로 흘러나오는데도 그저 멍하니 앉아 듣고만 있었다. 순식간에 문제를 읽어주는 음성이 끝나자 나 빼고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종이에 답을 체크했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강의실에 가만히 앉아 웃고만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스피킹과 라이팅 수업이라고 뭐 달랐을까. 스피킹 문제에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고 라이팅 시간에는 제대로 된 에세이는커녕 문단 하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토플 수업이 끝났다.





실패할 것 같은 불안감도망가고 싶은 마음


오후 10시. 이미 밖은 깜깜해졌고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강남대로도 조금은 한산해졌다. 살짝 쌀쌀한 봄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음속에 혼란스럽게 떠돌던 생각 부유물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강남역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이걸 계속 공부하는 게 맞을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한 달 공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지금 취소하면 오늘 수업료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환불받을 수 있는데 취소할까?


그 당시 내 감정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이었던 것 같다. 피하고 싶었다. 그 강의실에서 나만 못 알아듣고 못 읽는 것 같았다. 사회 불안의 역기능 세 번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신념'이 발동했다. 그래도 23살 어학연수를 하던 때에는 외국인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이 정도의 영어도 못 하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강의실에 앉아있던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이 나를 보고 비웃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웬 아줌마 한 명이 강의실에 와서 쉬운 문제조차 맞히지 못하고 강의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다 떠났다'라며 용기 낸 내 행동이 이 친구들의 놀림거리로 전락할 것 같았다. 강사는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한 내 답안지를 채점하며 '이 여자는 여기 왜 왔지?'라고 혀를 끌끌 찰 것 같았다. 모두 사회 불안의 역기능 두 번째 '사회적 평가에 대한 조건적 신념'이 만들어낸 불안이었다.


내 수준에는 이렇게도 어려운 시험을 몇 달 공부한다고 해서 원하는 성적을 금방 달성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자 상대적으로 익숙한 토익으로 바꿔 공부해야 할지 고민이 들기도 했다. 실패가 예상되자 그럴듯한 변명을 대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다고 달라지기로 해놓고 첫 번째 시도 만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관문은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다음 수업부터는 아예 출석하지 않거나 수강료를 환불받는 나였지만 이번에는 내 마음이 원하는 바가 조금 달랐다. 딱 한 달만 학원에서 하라는 대로 해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 맛본 완주라는 기쁨


목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 부득이한 야근이 아니면 결석하지 않기. 둘째, 더 공부하려 욕심내지 말고 딱 숙제만 하기. 셋째, 단어 쪽지 시험만큼은 만점 받기.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목표를 세웠다. 결석하지 않는 건 끝까지 해보겠다는 나와의 약속이었다. 수업을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다음 진도를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럼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되어 금세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또 기복이 심한 나를 알고 있었기에 컨디션이 좋은 날에도 오버하지 않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정해진 만큼은 꼭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단어 암기는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부분인 만큼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꼭 만점을 받고 싶었다. 첫 달은 욕심 내지 않고 끝까지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한 달간의 수업이 끝났다. 나는 세 가지 목표를 다 달성했을까? 결석은 하지 않았지만 숙제는 가끔 못해갈 때도 있었고 단어 시험도 만점을 받지 못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였지만 이상하게 한 달을 마친 내 마음에는 패배감보다는 성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한 가지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을 나에게 선물했다. 그건 바로 자존감이었다.


'나는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약 1년 6개월간 이어진 이 여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졸업 후 지금까지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힘이 돼주었다.


원래 내 별명은 '김찔끔'이었다. 뭐든 찔끔해보다가 금방 포기해서 동생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학원은 등록해놓고 마지막 수업까지 출석해본 적이 없었고, 물건을 사면 며칠만 열정적으로 쓰다가 금방 애정이 식어서 서랍에 처박아두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서랍에는 몇 장만 쓰고 놔둔 일기장과 노트로 가득했고 책꽂이에는 처음 몇 장만 읽고 꽂아놓은 책이 수십 권이었다.


32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가 어떤 일을 마지막 순간까지 완주했다는 성취감이 가져다준 희열은 꽤 컸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금방 포기하는 사람'에서 '끝까지 해내는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누군가는 뭐 하나 아직 이룬 것도 없는데 호들갑 떤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여전히 리딩 지문은 읽기 어렵고 리스닝 지문은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스피킹 수업 때는 답이 생각나지 않아 어버버 거리다 제한시간이 끝나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런데도 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처음으로 내가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 02화 사회 불안, 너였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