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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30. 2022

불안 대신 성장을 느끼다

내적 동기의 힘


한 달의 수업이 끝나고 나는 토플을 좀 더 공부해보고 싶어졌다. 어려운 시험인 건 맞지만 배우면서 재미있기도 했다. 열심히 외운 단어를 리딩 지문에서 만날 때면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미국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대한 리스닝 문제를 들을 때는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나중에 유학을 가게 되면 저 말을 꼭 써먹어야지'라고 생각하니까 문제와 답을 달달 외우고 싶어졌다.


이제 이 시험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고 어떻게 공부하면 될 것 같은지 살짝 감이 왔는데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초가 부족한 터라 한 달에 열두 번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는 성적을 금방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모든 과목을 원하는 만큼 들을 수 있는 인터넷 강의가 내 상황에는 더 나은 선택인 것 같았다.


6개월 동안 모든 과목을 들을 수 있는 프리패스를 골랐다. 그리고 금세 지겨워서 없던 일로 하는 내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끝까지 해내려면 데드라인이 필요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당장 토플 시험을 등록하기로 했다.


한국어로 된 YBM 사이트에서 접수할 수 있던 토익과 달리 토플은 미국 공식 사이트에서 해야 해서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다. 낯선 관문 앞에 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이대로 어영부영 끝나버릴 게 분명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지금 꼭 끝내야 했다. 


ETS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주소도 영문으로 번역해서 넣으며 한 단계씩 차근차근히 해나갔다. 마지막 관문인 190달러의 시험료까지 내고 나니 모든 절차가 끝났다. 머리로만 그렸던 목표가 진짜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졌다.





내적 동기의 힘


토플은 리딩, 리스닝, 스피킹, 라이팅 영역을 테스트하며, 각 영역당 30점 만점씩 총 120점 만점의 시험이다. 보통 유학에 필요한 점수는 80점 내외이고 MBA와 같은 곳은 100점 이상의 고득점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는 일단 총점 80점을 목표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각 과목당 최소한 17점에서 23점 사이로 받아야 했다. 영어를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금방 달성할 수 있는 커트라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영어 공부라고는 7년 전 토익 공부가 전부였고 토플은 일면식도 없었다. 문제 유형을 익히고 필수 단어를 외우는 데만 한참 걸릴 게 분명했다. 이런 내게 80점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면 달성할 수도 있는 적당히 가시권에 있는 목표였다.


80점을 받으려면 각 과목을 고르게 20점씩 맞아도 좋지만, 내 경우 스피킹과 라이팅이 약하니 리딩과 리스닝 성적에서 만회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스피킹은 말로 연습해야지 느는 과목인데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퇴근 후 한두 시간밖에 낼 수 없었고, 그마저도 다른 과목 공부도 해야 했기 때문에 연습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라이팅은 태어나서 한 번도 영어로 에세이를 써본 적이 없는 내가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성적을 올리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과목에 매달리느니 상대적으로 익숙한 리딩과 리스닝에 집중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지문을 읽고 들어서 이해하려면 일단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익히는 것이 먼저였다. 토플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필수로 암기하는 해커스 토플 VOCA 책을 구매했다. DAY 1부터 30까지 분량이 나눠져 있어서, 하루에 한 챕터씩 암기해나갔다.


책을 살 때만 해도 이 많은 단어들을 언제 다 외우지 싶어 겁이 났다. 김찔끔이란 별명답게 나는 수능을 공부할 때도 토익을 공부할 때도 단어 책을 사서 끝까지 공부해본 적이 없다. 많이 해봤자 DAY 3에서 끝났다.


이번에는 수능과 토익 공부를 할 때와 마음가짐이 달랐다. 그때는 '해야 해서' 억지로 했다면, 이번에는 '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는 지속성 측면에서 확실히 달랐다. 매일매일 한 챕터를 끝내는 기분도 썩 좋았다. 게임의 퀘스트를 하나씩 깨나 가는 기분이었다.





불안의 자리에 즐거움이 생기다


당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오늘 계획한 일만 한다'였다. 힘이 들어도 오늘 하기로 약속한 분량은 무조건 끝내는 것이 나와의 약속이었다. 조금 일찍 끝내서 시간과 에너지가 남더라도 거기서 멈췄다. 더 공부하지 않고 쉬는 시간을 가졌다. 내게 주는 보상이었다. 남편과 산책을 하며 수다를 떨거나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쉬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 연료가 100% 찬 채로 또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학생 때와 달리 직장인의 공부는 효율성이 관건이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평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일에 집중해야 했고, 주말에는 시댁과 친정 가족들 행사와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종종 야근과 주말 근무도 해야 했다. 솔로였다면 주말과 공휴일에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결혼한 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주말에는 가족 행사가 종종 있었고 명절에는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일도 가족과의 행복도 잡고 싶었고 공부도 잘 해내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일에 집중했고 가족 행사가 있으면 핑계 대지 않고 항상 참석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주말 하루 동안은 남편과의 데이트도 즐겼다. 퇴근 후 종종 동료들과 수다 타임도 즐겼다. 대신 그 밖의 모든 시간에는 무조건 공부만 했다. 쇼핑도 하지 않았고 유일한 취미 생활이던 독서와 영화 감상도 독하게 끊었다. 1년에 서너 번씩 가던 여행도 한 번으로 줄였다. 그리고 남은 자투리 시간을 싹싹 긁어모아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2시간 동안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역사 예능이나 유튜브를 즐겨봤는데, 그 대신 토플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지식을 설명해주는 강의를 들었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미국 역사, 과학, 예술 지식을 배우니 재미있었다. 미국의 후버댐과 그랜드 캐니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실제로 꼭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공부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해졌다.


화면을 볼 수 없을 때는 단어 강의를 켜놓고 귀로 들으며 걸었다. 눈으로 암기하고 귀로 한 번 더 들으니 두 번 암기하는 셈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발음도 웅얼대며 조용히 따라 했다. 점심시간에 동료와 식사 약속이 없는 날이면 혼자 자리에 앉아서 리딩 문제를 풀었다. 사무실에서 책을 펼쳐놓고 공부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문제집 몇 장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놓고 틈나는 시간에 스마트폰 사진첩을 열어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주로 숙제할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을 때 이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사진은 바로 삭제했다.


단어와 문장 암기를 위해 퀴즐렛(Quizlet)이라는 앱을 활용하기도 했다. 단연코 내가 가장 잘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낱말 카드 방식을 앱에서 구현한 것인데, 이미 만들어진 낱말 카드 세트들도 있었지만 나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일단 내가 낱말 카드를 만들면서 1차로 단어를 익히고, 문제를 맞히면서 2차로 익히고, 기억이 안나는 단어만 모아 3차로 또 익힐 수 있었다. 퀴즐렛을 사용하면서 단어 암기 속도가 확연히 빨라졌다. 장소를 이동할 때, 특히 사무실에서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실력이 점차 늘자 단어 암기가 더는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졌다.






직장인이라서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모아 효율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려 했다. 사실 이렇게 해서 내 성적이 월등히 올라갔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이 시간 동안 내가 얻은 수확은 성적 말고 따로 있었다. 그동안 몰랐던 나란 사람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나도 좋아하는 일에는 미친 듯이 몰두할 수 있다는 걸, 나도 아직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최적의 환경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가는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스스로가 늘 못나 보이던 나에게 생긴 긍정적인 변화였다.


무엇보다도 불안한 마음이 어느샌가 사라졌다. 오늘 하루 주어진 일만 생각하고 충실하게 살다 보니 불안에 눈길을 줄 틈이 없었다. 우울과 불안은 내 관심을 먹으며 자라는 아이들이었다. 관심을 끊으니 조용히 내 곁을 떠나버렸다.



매일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신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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