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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30. 2022

겁은 나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아

왜곡된 인지 교정의 경험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공기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9월 첫째 주 토요일 아침. 신분당선을 타고 강남역에 도착한 나는 9번 출구를 나와서 한 건물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토익과 토플 공부 좀 해봤다는 학생이라면 다 알법한 H어학원의 현장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혼자서 공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주말 아침 풍경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여전히 침대에 누워 늦잠을 자고 있었을 텐데. 평일에 출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올 일 없는 강남역인데 주말에 심지어 오전 8시 반에 도착했다.


내 의지로 걷는 게 힘들 정도로 늘 사람으로 붐비던 강남역은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꽤 한산했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학원 건물이 아닌 스타벅스였다. 주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기까지 몸을 이끌고 온 내가 기특하기도 했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 텐데 겁먹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오른손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꼭 쥐고 학원에서 미리 보내준 안내 문자에 따라 강의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저마다 남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은 어림잡아 세어봐도 백여 명이 되는 듯했다. 멍하니 서있다가는 자리가 금방 동날 것 같아 강의실 뒷문 바로 앞자리를 서둘러 차지했다. 학생들이 왔다 갔다 하느라 불편할 것 같았지만 남아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침에 스타벅스에서 감상에 젖어 시간을 낭비한 게 살짝 후회됐다.


자리에 앉아서 강의실을 쭈욱 쳐다보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토플 시험을 보겠다고 주말 아침에 이곳에 나와 공부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아는 주말은 오전 10시까지 늦잠 자다 일어나서 잠이 깨면 아점을 챙겨 먹고 소파에 누워 쉬다가 졸리면 낮잠을 자는 날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곳은 내가 있던 세상과 너무 달랐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모여 강렬한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느낀 에너지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주말 아침인데도 다들 활기차고 눈에서 빛이 났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동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습자지가 된 것처럼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쭈욱 빨아들였다. 그러자 금세 생기가 돌았다.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강사님이 수업을 시작했다. 2시간 동안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수업 내용으로 꽉꽉 채운 현장 강의는 인터넷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인터넷 강의는 듣다가 지루하면 잠깐 중단하고 딴짓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장 강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정신줄을 꼭 붙잡고 진도를 잘 따라가야 했다. 그래도 공부를 조금 해보고 시험도 한 번 치러보았다고 첫 수업시간에 많이 헤매지 않았다. 5월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나였는데 달라진 내 모습에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도 나름 성장한 건가 싶어 살짝 대견하기도 했다.


첫 번째 수업을 마칠 때가 되자 강사님이 스터디 모임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설문지에 'O'라고 표시해서 제출하라고 하셨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토익이나 토플처럼 시험을 준비하는 스터디 모임에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다. 취업 준비 스터디나 면접 스터디도 해본 적이 없다. 낯선 사람들과 모여 공부하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고 여겨졌고, 만날 때마다 커피값이며 밥값이며 지출해야 하는 점도 부담이었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돈도 아끼고 사람 때문에 불편해하지 않을 수 있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스터디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공부에 분명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민도 됐다. 항상 내 발목을 잡아온 불안이 또다시 내 귀에 유혹의 목소리를 속삭였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아줌마 뻘인 내가 스터디에 참여해도 될까?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스터디 과제를 제대로 못하면 민폐만 끼치는 게 아닐까? 

스터디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아서 도망치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불안은 습관처럼 나를 방문했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를 잠식하기에 이르렀다. 설문지 제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종이에 'O'를 쓸지 말지 계속 주저하던 그 순간 난생처음 보는 용기가 불쑥 올라왔다. '에라모르겠다이거 한다고 뭐 죽나한번 해보지 뭐.' 내면의 목소리였다. 손가락이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였고 어느새 종이에 'O'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남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그래서 들으면 어이없어할 수 있는 도전을 용기 있게 시작했다.






3시간 동안 이어진 수업이 끝났다. 스터디를 신청한 학생들은 귀가하지 않고 비어있는 옆 강의실로 모였다. 내 예상보다 많은 학생들이 신청한 것 같았다. 여러 개의 조가 편성됐고, 나는 그중 한 조에 속해 5명의 수강생들과 함께 스터디를 하게 됐다.


다 같이 모여서 첫인사를 나눴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각자 이름과 토플 공부를 왜 하게 되었는지 말했다. 나란히 앉은 두 여학생은 알고 보니 친구 사이였다. 방학 동안 토플 성적을 만들어서 다음 학기에 선발하는 교환학생에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학생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어려지는 것 같았다. 


그 옆의 남자분은 세종시에 사는 회사원이었다. 유학을 위해 토플 성적이 필요해서 현장 강의를 들으러 주말마다 KTX를 타고 올라온다고 했다. 그 옆자리 여자분은 무대 디자인을 전공했고 최근 퇴사를 했다고 소개했다. 더 큰 무대인 미국에서 무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담을 쌓고 지냈던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인 직장인이라고만 짧게 소개했다.


그렇게 모든 소개가 끝났고 스터디 리더를 뽑아 어떻게 진행할지 정한 뒤 헤어졌다. 앞으로 4주간 토요일과 일요일 두 차례씩 총 8번 만날 사람들이었다. 나이도 하는 일도 배경도 모두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낯선 경험을 내 의지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늘 익숙한 것만 하던 내게 일어난 작지만 엄청난 진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스터디 멤버들이 각자 소개하던 순간을 계속 생각했다. 저마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데 그 꿈이 꼭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금방 사라질 허풍이나 신기루가 아니었다. 저마다의 꿈이 아직은 작은 새싹 같아도 언젠가는 땅에 뿌리를 깊게 뻗은 튼튼한 나무로 자랄 것만 같았다. 그날 내 꿈에도 새싹이 돋았다.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잘 키워보고 싶어졌다.






걱정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스터디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신청 전에 우려했던 일들은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에 대한 반대 경험치가 쌓였다. 스터디원들이 나를 나이 많은 사람이라 불편해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오히려 내게 일하면서 공부까지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응원해주었다. 스터디 모임이 후반부로 갈수록 불안함의 정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오히려 스터디를 마치고 나면 오늘도 해냈다는 성취감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 다음번에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도 생겼다.


예상하지 못한 반짝 서프라이즈 선물도 있었다. 한 달간 스터디를 하며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출석하고 과제를 제출했더니 소정의 상금을 받게 된 것이다. 마지막 날에 보증금으로 낸 금액보다 만원 가량을 더 돌려받았고, 그 돈으로 한 달간 고생한 나를 위해 비싼 커피 한잔을 사서 마셨다. 스터디 재테크로 돈도 벌고 성취감도 얻었으며 '나는 완주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한층 강해졌다.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수확은 '왜곡된 인지의 교정'이었다. 내가 지레 겁먹는 대상들이 어쩌면 그렇게 무섭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차차 하기 시작했다. 낯선 것이라면 질색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성과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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