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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30. 2022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토플 공부 덕분에 알게 된 번역이라는 세계


2018년 5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름은 번아웃. 공부 기간이 점차 길어질수록 공부의 의미가 희미해졌다. 9개월간 공부해도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자 자신감도 점점 바닥을 쳤다. 내 능력에 대한 의심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탁해 한꺼번에 나를 공격했다.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어학원 홈페이지만 가도 한 달 만에 원하는 점수를 떡하니 받았다는 사람들의 인증글이 넘쳐나는데 9개월째 나는 뭐 하고 있나 싶었다. 책상에 앉는 것조차 싫어지고, 애써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아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때 필요한 건 쉼 그리고 동기부여다. 나라는 자동차에 연료 주입이 필요한 타이밍인 것 같았다. 방향을 잃고 지쳤을 때 잠시 쉬어가면서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한 이유를 되새겨보기로 했다.


왜 토플 공부를 시작했지? 대학원에 진학해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싶었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직업을 갖고 싶기도 했고 마침 사회복지사가 미래 유망 직업이라고 하길래.

그 직업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었을까?......


세 번째 질문을 던졌을 때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말문이 턱 막혔다. 내적 동기에서 비롯한 직업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 당시에는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내 성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인지도 모르겠고, 힘든 순간이 와도 과정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또 대답하지 못했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차의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연료를 넣어야 하는지, 목적지를 바꿔야 하는지, 조금 천천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완전히 멈춰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다.


사회복지와 관련된 직업을 검색했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실제 종사자들이 쓴 블로그 글이나 온라인 카페 글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대학원 졸업 후 진로, 사회복지 관련 직업 종류, 사회복지사들의 인터뷰 등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읽고 들으려 했다. 커리어 관련 오프라인 원데이 클래스에서 우연히 만난 현직자에게 직접 질문하기도 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그러려면 최선을 다해 판단 근거를 수집해야 했다.






일주일 뒤 내린 결론은 멈춤이었다. 정보를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내가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 성향에 맞는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까지 나는 봉사 활동을 자발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모두 학교에서 혹은 회사에서 시켰기 때문에 했다. 물론 하는 동안에는 기분이 뿌듯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혹은 살면서 사회복지학이라는 과목을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그저 지금 내 삶이 고달프니 복지국가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고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을 뿐이다. 그 어디에도 좋아하는 마음은 없었다.


갑자기 갈 길을 잃자 그동안 열심히 한 토플 공부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새로운 삶을 꿈꿨는데 결국 모두 헛바람이었나 싶어 허무하고 또 슬펐다. 그동안 공들인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속상한 마음이 차올랐다. 동시에 지금껏 한 일이 속된 말로 삽질이었음을 인정하는 것도 꽤 힘들었다.


내 삶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갔다. 목적 없이 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날이 이어졌다.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무념무상으로 출근하는 하루. 여유 시간에는 멍하니 유튜브를 보고 포털 기사를 모조리 다 읽고 그렇게 해도 시간이 남으면 남의 블로그 글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는 본능에 충실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다음 브런치에서 글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서메리 번역가가 연재한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라는 이름의 매거진이었다. '기술 하나 없는 사무직 노동자'라고 소개하는 저자의 이력에 눈길이 갔다. 글쓰기와 독서가 취미인 사무직 회사원이던 저자가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 공부를 해서 출판번역가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번역…?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가 마음이 꽂혔다. 글쓰기와 독서라면 나도 저자만큼 좋아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토플 공부를 하기 전에는 매달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에 나갔다. 매주 한두 편씩 글을 써서 네이버 블로그와 다음 브런치에 올렸다. 가끔 내 서평이 유명 서점의 뉴스레터에 실리기도 했고 네이버 메인에 올랐던 적도 있다. 2015년에는 글쓰기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글을 써서 책을 내기도 했다. 모두 내가 좋아서 한 일들이었다.


당시에 책과 글쓰기에 관련된 진로를 정해볼까 싶어 자유기고가 수업도 들어보고 독서 토론 진행자 강의도 수강했었다. 하지만 두 직업 모두 내 성향과 맞지 않았다. 한 곳에 진득하게 앉아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자유기고가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취재해야 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토론을 진행하는 독서 토론 리더 또한 사회 불안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심리 상담을 받기 전이었고 불안 때문에 남 앞에 나서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글쓰기와 책 관련 직업은 꿈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번역가라는 직업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당연할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변호사님 책상 위에 올려드리는 영자신문의 1면 기사도 해석하지 못했다. 토익처럼 객관식 문제만 겨우 풀 수 있는 수준이던 내게 영어로 된 책 한 권을 읽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유려한 우리말로 번역하는 출판번역가라는 직업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난 1년 동안 토플 공부를 하면서 일정 수준의 독해력을 갖추게 됐다. 번역을 당장 할 수는 없어도 번역 공부에 입문할 수 있는 수준은 된 것이다. 책을 읽고 글로 옮기는 길.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 머물며 할 수 있는 일. 주변에 방해하는 사람 없이 혼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일. 낯선 분야의 책을 옮기면서 새로운 지식도 습득할 수 있는 번역가라는 직업은 내 성향과 딱 들어맞았다.






출판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곧바로 출판번역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의 입문반 수업을 신청했다. 직접 해보면 내가 이 직업과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번의 삽질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등록한 아카데미는 2년 전 자유기고가 수업을 들었던 곳이었다. 자유기고가 수업을 들을 때 바로 옆 방에서 번역 수업을 듣는 사람들을 보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그 수업을 듣게 된다니. 


게다가 나를 그렇게나 괴롭혔던 토플 공부가 번역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토플 공부로 0에서 1로 한 단계 올라서니, 그만큼의 새로운 기회가 생겼고 나의 시야도 넓어졌다. 내가 가진 능력치도 1만큼 더 생겼다. 세상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다


매주 화요일마다 칼퇴근을 하고 테헤란로에서 합정동으로 향했다. 지옥철이라 불리는 9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도,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이고 치여서 숨쉬기 어려워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늘은 무슨 내용을 배우게 될지 생각하며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뿐이었다. 


영어 원문을 읽고 번역하고 우리말을 다듬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다. 수업시간에 강사님과 다른 수강생의 번역문을 보면 내 번역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기보다 다음 강의 때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10주 동안 번역 수업을 들으며 번역가가 되겠다는 내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일단 영어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수강생들보다 오역을 내는 빈도가 높았다. 지금까지 읽은 원문이 토플 지문밖에 없으니 여러 종류의 원문을 많이 읽으면서 독해력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번역에 필요한 문법 지식도 쌓아야 했고 일단 번역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수업을 들을수록 부족한 실력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예전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토플 시험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분명 달라졌다. 지금은 잘 못하더라도 노력해서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내 안에 숨어있던 내적 동기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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