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영어 시험을 치르다
5월부터 시작한 수업이 어느덧 종강을 향했다. 7월의 어느 여름날, 마지막 수업을 마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번역가가 되겠다는 꿈은 확실해졌지만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아카데미에서 심화반을 이어서 수강하는 것.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물론 출판번역가가 되는 데 대학원 학위는 필요하지 않다. 출판번역가는 학벌과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에 따라 데뷔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런데도 나는 대학원에 계속 미련이 남았다. 석사 학위는 취업한 직후부터 품었던 꿈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는 부모님께서 대주신 학비로 다녔기에 내가 원하는 전공을 하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취업해서 돈을 벌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좋아하는 과목을 깊이 있게 공부해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어권 국가로 유학도 가고 싶었다.
네이버에 번역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을 검색해보았다. 일반 영문학과에서 번역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을 수도 있지만, 통역과 번역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통번역대학원이 따로 있었다. 번역만 가르치는 번역전문대학원도 있었다.
입학 요강과 기간, 학비를 찾아봤다. 학비도 비싸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하려면 최소 1년간의 입시 준비가 필요했다. 이미 토플 공부로 1년을 쓴 나로서는 대학원 입시에 1년이라는 시간을 더 쓸 수가 없었다. 솔직히 1년만 걸릴지도 미지수였다. 통번역대학원 입시에는 장수생도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입학하게 되더라도 평일 오전과 오후에 개설된 수업을 들으려면 일을 그만둬야 했다. 내가 일을 그만두면 앞으로 최소 2년간 남편의 수입에만 의존해 살아야 한다. 내 꿈을 지지해주는 사람에게 경제적인 희생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장인을 위해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수업을 개설한 대학원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한 곳이 눈에 띄었다. 호주의 맥쿼리대학교 통번역학 석사 과정 수업을 고려대학교에서 들을 수 있는 과정이 있었다. 직장인을 위해 토요일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과정도 있었고, 학비도 내가 모아놓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지막 학기에는 호주 시드니에 있는 본교에 직접 가서 수업을 듣는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입학이었다. KU-MU 과정은 다행히도 두 가지 입시 전형으로 신입생을 모집했다. 하나는 일반 전형으로 한영 번역 시험과 원어민과의 구술면접을 통과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반 전형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특별 전형을 선택했다. 토플이나 아이엘츠 성적이 학교에서 정한 기준을 넘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본 토플 성적은 지원 기준 성적에 미치지 못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동안 공부한 게 있으니 다시 보면 될 것 아닌가? 승산 있는 도전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을 조금 수정해보기로 했다. 안 되는 방법을 계속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입학이지 장인 정신이 아니었다. 입학할 수 있는 또 다른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때마침 유학 준비를 하던 친구가 해준 조언이 생각났다. 아이엘츠가 토플보다 시험 문제가 쉬운 편이고, 무엇보다도 내가 항상 망치던 스피킹 시험 환경이 토플과 다르다고 했었다. 그 당시 토플 스피킹 시험은 시험장에 놓인 여러 대의 컴퓨터 앞에 수험생이 다닥다닥 앉아서, 저마다 헤드폰을 끼고 컴퓨터 오디오에서 나오는 문제를 들은 후 제한시간 내에 대답해야 했다. 불안 기질이 높은 나는 사람들의 시선과 제한된 시간 때문에 더욱 긴장해서 여러 번 백지상태가 되곤 했다.
아이엘츠는 토플과 달리 별도의 시험장에서 원어민 감독관과 일대일로 시험을 본다. 수험생이 긴장해서 즉각 대답하지 못해도 감독관이 차분하게 기다려준다. 여러모로 나에게 맞는 시험 유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토플과 공부하는 내용도 비슷했다. 시험 유형만 살짝 다를 뿐이었다. 더는 주저할 필요도, 우물쭈물 댈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또 H 어학원으로 향했다. 시험 유형을 빠르게 파악해서 3개월 안에 반드시 점수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퇴근하고 강남역 H 어학원에서 공부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8월, 9월, 10월. 3개월이 흘렀고 두 번의 시험을 보았다. 둘 다 입학할 수 있는 커트라인 점수에 미치지 못했다. 정말 나는 대학원에 입학할 수 없는 걸까.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년 6개월의 공부가 헛수고가 되는 것만 같아 기운이 점점 빠졌다.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11월 3일에 치르는 시험을 접수했다. 원서 접수 마감일 전에 성적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시험이었다. 이번에도 점수가 안 나오면 대학원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연말도 됐으니 남편과 여행을 다녀오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11월 3일. 강남역 시험장에서 마지막 아이엘츠 시험을 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랬을까. 리딩과 리스닝, 라이팅 시험이 공부했던 것보다 쉽게 느껴졌다. 시험 볼 때마다 늘 집중되지 않고 답답했는데, 이번에는 문제가 술술 읽히고 답도 쉽게 보였다. 하늘이 내가 불쌍해서 도와주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번에는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로 스피킹 시험을 치르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는 '역시나'로 바뀌었다. 시험관만 기계에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시험은 시험이었다. 나는 시험관 앞에서 또 얼어버리고 말았다.
불안의 전조 증상들이 하나씩 올라왔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심장 박동수는 계속 빨라졌다. '괜찮아. 잘 보고 싶어서 불안해지는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떨지 말자.'라고 나를 계속 다독였지만 이놈의 불안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스피킹 시험을 망치고 건물 1층 입구 구석에 쪼그려 앉아 '망했다'라는 말을 수십 번했다. 아니 수백 번한 것 같다. 때마침 퇴근하던 원어민 시험관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그가 나를 보며 웃고 지나갔다. 저것은 분명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왜곡된 인지가 다시 등장했다) 너무도 창피해서 땅굴을 파고 지하로 숨고 싶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라는 아쉬움과 '왜 그랬을까'하는 자책이 집으로 가는 내내 번갈아가면서 나를 괴롭혔다.
집에 돌아온 나는 교재들을 모조리 상자에 넣어 책꽂이 맨 위 잘 안 보이는 곳에 처박았다. 토플이건 아이엘츠 건 당분간 꼴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연말이니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심신을 회복하고 싶었다. 아이엘츠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5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