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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30. 2022

합격, 그리고 새로운 시작

불안한 당신에게 공부를 권합니다


띠링 띠링.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던 금요일 오후 4시. 휴대폰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아이엘츠 성적이 나왔으니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라는 문자였다. 시험을 마치자마자 망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늘 그랬듯 이번에도 지난번과 비슷한 성적이겠거니 싶었다. 별 기대 없이 점수나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화장실 가는 길에 휴대폰을 열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응...? 이게 뭐지?


식상한 표현이지만 진짜로 처음에는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싶었다. 망한 줄로만 알았는데 드디어 원했던 점수가 나온 것이다. 


너무 놀라서 손이 덜덜덜 떨렸다. 혹시 오류가 난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의 점수가 내 아이디로 올라온 건 아닐까 계속 의심했다. 믿을 수 없어서 홈페이지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다. 로그아웃했다가 다시 로그인해서 들어가 보아도 내 점수는 그대로였다. 드디어 내가 해낸 것이다. 1년 6개월 만이었다.


벅차오른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너무도 간절히 원했기에 목표를 이룬 그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앞으로 번역가가 되기까지 구만리 첩첩산중이겠지만 첫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이룬 것만 같았다. 


서른두 살 봄에 시작한 영어 공부가 서른세 살 겨울에 끝났다.

그리고 서른네 살 봄. 나는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렇게 내 여정의 1막이 막을 내렸다. 토플로 시작된 공부 여정은 사회 불안을 이겨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불안하고 두렵고 겁이 나서 하지 않았던 일을 하나씩 부딪혀보고 넘어져도 보고 일어나서 다시 도전해보는 시간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긴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이것이 내 속도라고 믿는다. 남들의 속도를 부러워하면서 조급해하지 않고 내  속도로 천천히 가되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짧은 인터미션이 끝난 뒤 2막이 시작됐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을 외칠 줄 알았던 내 바람과 달리 통번역대학원 생활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모든 수업이 내게는 불안에 노출되는 환경이었다. 번역과 통역에 대한 크리틱을 매 수업마다 주고받았다. 모든 수업은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됐다. 대중 연설을 준비하고 실습하는 수업도 있었다. 사회 불안을 겪는 내게는 매 순간이 장애물이었다.


토플과 아이엘츠 스피킹 시험을 볼 때에도 극도로 떨었던 나인데 통역은 내 불안을 극한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통역 후에 어김없이 날아드는 교수님과 동기들의 크리틱도 무서웠지만, 가장 상처가 된 건 내가 나에게 하는 크리틱이었다. 완벽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형편없는 실력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넘어지긴 했어도 금방 다시 일어섰다. 1년 6개월간의 시간 속에서 단단히 뿌리내린 나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그때의 경험과 감정들이 내 몸 곳곳에 세포가 되어 숨어있다. 그리고 이 세포들은 내가 좌절할 때마다 신호를 보내온다. 처음에는 어렵고 서툴지만 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도 모르게 믿게 된다. 그 힘 덕분에 툭하면 그만두고 도망치던 나는 2년간의 여정을 또 한 번 완주했다.  






2018년 봄에 나는 암흑 속에 있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몇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 같았다. 로펌 비서라는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작고 귀여운 연봉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문과 출신의 사무직이라는 타이틀도 못마땅했다. 공대를 갈 걸, 코딩을 배울 걸, 주식을 할 걸... 매일을 과거 속에 살았고 나름 최선을 다해 내린 선택들을 후회했다. 잘 나가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점점 열등감은 커졌다.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변에 말하면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괜히 뭐 시도해볼 생각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조언을 얻고 싶었다. 응원을 듣고 싶었다. 그럴 때 나는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주부에서 수십수백억의 자산가의 성공담, 단칸방에 살던 가난한 학생이 하버드에 합격한 수기보다는 아이 엄마가 약대에 도전하는 이야기공무원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카페를 연 이야기처럼 보통 사람들에 마음이 끌렸다. 평범한 사람이 용기를 내서 성취를 이뤄내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시절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좌충우돌 도전기를 들으며 동기부여를 받았고,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는 한 달만에 쉽게 달성하는 영어 성적을 1년 6개월에 걸쳐 성취한 것이 글로 쓸 만큼 자랑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랬듯 나의 경험이 과거의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전 다른 사람들의 영상을 보며 들었던 말을 이제 내가 해주고 싶었다. 잠깐 트랙을 벗어나도 삶이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불안정한 삶처럼 보이지만 생각만큼 불안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나는 외서 리뷰를 주로 하는 출판번역가 지망생으로 살고 있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아직 역서가 출간되지 않은 영문 서적을 읽고 검토서를 작성해 보내는 일을 한다. 그밖에 시간에는 내 역서를 내기 위해 번역을 한다. 내가 직접 원서를 발굴해서 번역하고 전자책으로 출간할 것이다. 남는 시간에는 이렇게 브런치 글도 쓰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출판번역가로 데뷔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특별한 수입이 없기에 회사를 다닐 때 누렸던 것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회사에서처럼 누군가 내게 일을 던져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할 일을 찾는다. 언제 데뷔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다. 여전히 내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만큼 불안하지 않다. 우울하지도 않다. 나는 확실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미래가 예전만큼 무섭지 않다. 오늘을 충실히 보낸다면, 이렇게 계속 노력해나간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언젠가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서 얻은 믿음 덕분에 오늘의 나는 좀 더 단단해졌다.


그렇기에 불안하고 우울한 당신에게 공부를 권한다. 공부를 하면서 불안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작은 허들을 하나씩 넘으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계속되는 과제들로 도전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었고 완주라는 기쁨도 맛보았다. 헛된 시간이었나 싶었던 경험이 오히려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어주기도 했다.


인생에는 꽃길만 있는 건 아니기에, 내가 아직 밟지 못한 그 길에 진흙탕이 있을지 물웅덩이가 있을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뭐든 배워보는 건 어떨까. 나처럼 꼭 영어 공부일 필요는 없다. 배움의 과정에는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재미도 있고 어렵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반드시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과 성취감을 맛볼 수도 있다.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자존감이 올라가면 불안감이 줄어든다. 아니, 불안이 올라와도 잘 다룰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러니 뭐든 배워보길 권한다. 당신도 나처럼 공부를 통해 평온함을 찾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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