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작품, 당신이라는 문장
그해 여름, 나는 '나'를 찾는 방황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일을 할수록 글에 집중할 시간은 줄었고, 상사와의 마찰 속에서 '왜 회사는 내 능력의 밑바닥까지 쓰려하면서 합당한 대가는 지불하지 않는가' 하는 화가 치밀던 참이라, 퇴사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의 결심 중심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그가 있었다. 뮤지컬 작가인 자신의 동기를 소개해 주어 내 글에 대한 전문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고, 힘들 때면 "밥이나 먹자"며 불러내어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받기만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나는 그에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죽 공방에 다니며 한 땀 한 땀, 그의 손에 어울릴 만한 색의 가죽으로 지갑을 만들었다. 그의 이름 이니셜을 새겨 넣을 땐, 선물을 받고 좋아해 줄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이건 조금 설레는 감정이었다. 힘이 되어준 마음에 정성으로 화답하는 것뿐인데, 이 정도 설렘쯤이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선배, 줄 게 있어요. 시간 괜찮은 날 있어요?”
우리는 그가 발견했다는 서울역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장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사뿐한 걸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를 보는데, 웃음이 터져버렸다. 네이비색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그의 옷차림이, 비슷한 색감으로 맞춰 입은 내 모습과 꼭 커플룩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맞춰 입으려고 해도 이렇게 똑같을 순 없겠다"며 한참을 웃었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준비한 가죽 지갑을 건넸다. 그는 놀란 눈으로, 정말 대단한 것을 받은 양 크게 기뻐해 주었다. 덕분에 내 마음도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항상 이런 마음으로 내게 베풀었던 걸까.
“누나, 내가 진짜 맛있는 육회비빔밥 집 알아요. 내가 쏠게요, 가요!”
아이처럼 빛나는 눈으로 말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광장시장으로 향하는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늘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조금 다른 듯했다.
북적거리는 시장 안,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육회비빔밥을 한입 맛보는 순간, 신선함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와, 진짜 맛있어요! 이런 맛 처음이에요."
정말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그는 활짝 웃으며 "많이 먹어요."라고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불쑥 물었다.
“누나는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요?”
“엄마랑 남동생, 여동생이랑 같이 살아요.”
“아버지는요?”
“아빠는… 없어요. 어릴 때 이혼하셨고, 그 뒤로는 소식을 잘 몰라요.”
“보고 싶지 않아요?”
“가끔 생각날 때도 있지만,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면 다행이다, 그 정도.”
내 인생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편하게 내 가정사를 이야기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물어봐 준 사람도, 그 질문에 이토록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한 나 자신도 처음이었다. 이 하루는 분명, 잊히지 않을 한 편의 문장으로 내 안에 기록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한 날의 떨림과 편안함,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나의 첫 작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오를까. 이 작품이 나를 작가의 길로 이끌어 줄까. 기대감이 가득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행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교수님이 음주운전 사고를 내셔서, 연출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조연출의 목소리에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애써 되찾은 내 첫 작품은, 이제 방향을 알려줄 선장도 없이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가 되었다.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평온한 마음을 찾듯 선배에게 전화했다. 그와의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끊기자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골목을 비춰주는 고장 난 가로등 불빛이 깜박였다. ‘어두웠다, 밝아졌다.’ 내 첫 작품도 저 고장 난 가로등 불빛처럼 어두워질 수도, 밝아질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영원히, 미완의 문장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겠구나.’와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위로하던 그의 목소리가, 그와 함께한 평범하지만 온전했던 하루가, '잊히지 않을 문장'이 되어 내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텅 빈 페이지를 펼쳤다. 어쩌면, 그와 함께 쓰여질 '당신이라는 문장'을 기대하며, 나는 다시 쓰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