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이 뻔한 말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아이는 어린이집 산책길에서 주운 나뭇잎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글을 쓰다 떠올린 생각들을 나눈다. 남편은 회사 이야기 대신, 새로 나온 영화나 요즘 빠져있는 음악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불쑥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팀원들과 '최근 기억에 남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그의 이야기는 평범한 어느 오후의 풍경이었다.
“우리 가족이 함께 놀이터에서 놀았잖아. 당신이랑 총총이가 서로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내가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어. 바람도 선선했고, 둘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렸지. 그때, 가슴이 꽉 차게 따뜻해지더라고.”
남편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팀원 한 명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거야. 아마 그 친구도 가족과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이 떠올랐나 봐.”
남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우리의 치열했던 신혼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런 평범한 오후의 풍경을 꿈꿀 여유조차 없었다. 그 직원의 눈물이 어쩐지 남일 같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 말은 모두의 바람이다. 나 역시 한때는 행복을 조금 거창하게 생각했다. 공모전 당선 소식을 기다렸고, 무대 위에서 내 이름이 불리기를,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런 거대한 욕망들은 때론 눈부셔서 행복 그 자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꿈들이 좌절되고 수많은 실패의 목록을 서랍에 쌓아두고 나서야, 나는 조금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여름의 분홍빛 노을이 하늘을 느릿하게 물들일 때, 나와 남편은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밤 산책을 했다. 이제는 사랑스러운 아이도 그 길을 함께 걷는다.
“총총이도 한 입만!”
아이가 까치발을 들면,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게 해 주고, “맛있지?” 하며 웃는다. 우리는 서로의 웃는 얼굴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고 마음에 새긴다.
문득, 내 곁에서 웃고 있는 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지나온 시간들이 겹쳐 보였다.
혼자 울던 아홉 살의 아이, 인정받고 싶어 뾰족하게 날을 세웠던 스무 살의 청춘, 실패의 부끄러움에 숨어버렸던 어제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그 모든 상처와 버텨냄이, 결국 이 평범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순간을 위해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마음이 여름의 노을빛처럼 꽉 채워져 몽글거리는 이 짧은 순간들이 모여, 나의 삶을 온전히 충만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에게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이 순간의 아이스크림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이라는 뻔한 말의 가장 완벽한 대답이다.
에필로그
하나씩 꺼내어 음미했던 나의 아이스크림
늦은 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다.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서툴렀지만 나름 아름다웠던 이야기의 끝. 노트북 화면을 위로 올리자, 내가 지나온 시간의 계절들이 목차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적혀 있다.
그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지금 먹는 이 순간의 아이스크림>을 쓰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외면하고 묵혀두었던 내 안의 수많은 '나'와 다시 만났다. 빛이 없다고 생각해 어둠 속에 숨어 울던 아홉 살의 아이도, 인정받고 싶어 뾰족하게 날을 세웠던 스물세 살의 청춘도, 실패의 부끄러움에 숨어버렸던 어제의 나도, 모두 내가 꾹꾹 눌러쓴 글 안에서 다시 숨 쉬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전의 나는, 꽁꽁 숨겨둔 상처를 지우고, 서툴렀던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더 단단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계절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안다. 상처는 결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 그대로를 인정하고 가만히 안아주는 것임을. 과거는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그 의미를 다시 발견해 주는 것임을.
나는 더 이상 웅크린 고요한 아이의 등을 떠밀어 세상으로 내보내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내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는 법을 배웠다.
"괜찮아, 이 달콤함이 녹는 동안은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돼." 하고 말해주면서.
어느 날은 노트북을 덮고 눈앞에서 놀고 있는 남편과 아이의 투명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감한다. 남편이 작게 틀어놓은 음악 소리도 함께 맞이해 준다. 나는 곧장 냉동실로 가 아이스크림 한통을 꺼낸다. 작은 그릇 세 개에 우유 맛 아이스크림을 한 덩이씩 담고, 그 위에 작고, 새콤한 블루베리 몇 알을 올린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는 남편과 아이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을 보며 내 마음을 살며시 들춰본다. 이 책은 어쩌면, 내가 내 안의 모든 '나'들과 화해하기 위해 써 내려간 길고 긴 편지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끝까지 함께 해 준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서랍 속에는 어떤 실패의 목록이,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웅크린 아이가 살고 있나요? 그리고 오늘, 지친 당신을 위로해 줄 당신만의 아이스크림은 무엇인가요?
부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는 오늘의 당신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맛있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선물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창한 행복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지금 먹는 이 순간의 아이스크림, 그 작은 달콤함의 힘으로 우리의 삶은 계속될 테니까요.
끝으로 지금까지 저의 길고 서툰 이야기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함께 걸으며 넘겨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