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보다가 좀 엉뚱한 장면에서 울음이 터진 적이 있어요. 주인공 임진주(천우희 분)의 엄마(강애심 분)가 진주의 연애에 관심을 가지면서 하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살림을 안 해봐서 모르나 본데 바쁜데 심심해”
그 말을 듣고, 주부의 일상을 어쩌면 저렇게 찰떡같이 비유했을까 싶어서 처음에는 ‘푹’ 하고 소리 내 웃었습니다. 그러다 왜인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와 드라마를 보다 말고 그만 고개를 파묻고 끅끅 울어버렸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고, 재택근무하던 날들의 제 마음이 딱 그랬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머리도 마음 편하게 감을 수 없어서 기름으로 떡 진 머리칼을 질끈 묶고, 30평의 좁은 집안에서도 뛰어다닐 정도로 바빴습니다. 아직 어린 세 아이들은 수시로 엄마를 불러재꼈고 밥이며 설거지, 빨래는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머릿속 말풍선에서는 항상 ‘심심하다, 외롭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몸은 여기에 매여 있지만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엄마의 일상이란 게 대부분 그렇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왜 웃을 날이 없겠습니까. 웃음은 잠시고, 반복은 길어서 문제인 거죠. 똑같지만 또 똑같지만은 않은 날들의 연속. 게다가 아이들이 사고라도 치면, 아이니까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꾹꾹 눌러 담았던 화가 결국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릴 때도 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던 어느 날의 제가 그랬습니다. 3살, 1살. 한창 손이 많이 가는 때라서 그야말로 최고의 육아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차였죠. 잠시 제가 다른 일을 하던 사이, 어찌 된 게 둘째 아이가 주방 찬장을 열고 무려 깨 통을 공략했습니다. 뭔가 낌새를 채고 다가갔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아이는 무려 국산 참깨를 바닥에 쏟아놓고 조심스레 헤집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비싼 국산 참깨를 다 쓸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닦은 지 1주일은 분명히 넘었을 바닥에 있는 저 깨를 하나하나 다시 담을 수도 없고. 그걸 보는 순간 정말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글부글, 용암이 끓어오르며 활화산처럼 폭발하려던 찰나, 불현듯 전구 하나가 딱 켜지면서 ‘제목 한 줄’이 떠올랐습니다. <깨 쏟아지는 우리 집> 오늘의 블로그 포스팅 거리가 하나 생겨난 겁니다. 그 순간 마구 끓어오르던 활화산은 휴화산이 되었습니다. 얼른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방금 전의 그 폭발은 어디로 가고, 카메라 속 아이를 바라보며 글쎄 제가 웃고 있지 뭡니까?!
당시 저는 육아에 대한 단상을 기록하기 위해 싸이월드 블로그를 열심히 하고 있던 때였는데,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그 순간은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아이는 저의 사자후에 영문도 모른 채 울음을 터뜨렸을 테고 저는 짜증과 한탄이 잔뜩 섞인 한숨을 스물세 번쯤 내뱉으면서 깨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담았을 겁니다. 글을 쓰는 엄마였기 때문에 그 미쳐버릴 뻔한 순간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만난 하나의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데일리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루에 네 개의 코너가 나가야 하는데, 아무리 별의별 일이 많은 연예계라고 해도 매일매일 4개씩이나 되는 ENG용 뉴스가 발생하진 않습니다. 그러면 담당 작가 입장에서는 흔히 말하는 ×줄이 타기 시작합니다. 어쩌지, 어쩌지, 손톱 잘근거리며 다들 인터넷 뉴스만 검색하고 있을 때, 한 줄기 빛이 내려옵니다. 누군가 한 명이 대형 사고를 쳤다는 속보가 전해진 겁니다. 손톱 잘근거리던 작가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의자 안으로 깊숙이 가라앉습니다. 그 연예인에게 미안하면서도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우리를 살렸어요’
글을 쓰면서부터는 종종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무슨 재밌는 일 없나’라는 하이에나 같은 시선으로 일상을 샅샅이 훑고 있는 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글감은 일상 어디에든 숨어 있습니다. 아이가 툭 던진 말속에도 숨어 있고, 오늘 갑자기 고장 나 버린 세탁기 안에도 감춰져 있습니다. 그렇게 글감을 찾아내고 나면 짜증 나던 일상은, 유레카를 외치는 이벤트가 되어 버린답니다.
오죽하면 저는 가장 심한 부부싸움을 해서 6일간 각방을 쓴 일이 벌어졌을 때도, 아이 방에서 꺼이꺼이 울면서도 ‘앗싸! 이걸로 글 쓰면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지 뭡니까. 좀 어이없나요? 에흠! 그때 제가 좀 글감에 목말라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