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몇줄로 정리하자면, 버스기사인 남편이 공갈 자해 사기단에 걸렸다. 어쨌거나 승객이 자리에 앉기 전에 출발한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기에, 뭔가 많이 듣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걸 알면서도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마을버스에서 2년 가까이 있다가 이제 막 시내버스로 승급한 남편은 수습기간이라는 사실. 3개월이 되기 전 사고가 나면 잘리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회사에 알리지 않고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버스 기사들 사이에는 알려진 연령대와 성별, 패턴이 있다. 나는 처음에는 정말 운나쁜 사고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걱정했지만 점점 그 여자의 태도가 그 패턴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말로만 듣던 일에 당하는구나, 싶어 아찔했다. 2, 30만원 정도 주고 끝내라는 조언을 주위에서 들었는데, 갑자기 아파서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없으니 언니를 보내겠다는 말을 듣고는 심각하다 싶었다. 왜냐, 둘이 나눠먹자면 2, 30 가지고는 부족할테니.
결과적으로 남편이 사정사정해서 50만원으로 합의를 봤다. 남편이 전화를 해 바로 내 통장에서 돈을 보내주었는데, 근거가 남게 교통사고 합의금이라는 메모를 넣었다. 초짜일때도 당하지 않은 사기를 당했다고 울분을 토하며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는데... 아하하하, 돈을 뜯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여자 앞에서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애원하는 모습, 울먹이는 모습까지 재연하는데 정말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손까지 잡으며 사정하려고 했단다.
남편은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가려고 마음 먹었다. 목적은 첫째, 최대한 적은 돈으로 처리할 것. 둘째, 회사에 연락 안 가게 할 것.
약속된 까페에서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고 언니라는 작달막한 여자가 들어왔다. 들어오더니 카운터에 가서 아주 자연스럽게 테이크아웃용으로 주문을 한다. 흠, 간단히 끝날 거라고 생각했나보지.
남편은 최대한 기가 죽고 불쌍한 표정을 짓고 앉아있었다. 여자가 말을 돌리며 이말 저말 하고 있는 동안 남편이 한숨만 푹푹 쉬고 있자니 여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나오셨을 거 아니에요. 생각한 바를 말해보세요."
"아뇨... 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금 뭘 어떡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남편이 목소리를 떨며 죽어가는 듯이 말하니 여자는 말문이 막힌 듯 하다.
"아니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그럼 우리 돈으로 병원을 다닐까요?"
"아니, 보험으로 하셔야죠...."
"옛날에 우리 오빠가 버스했는데 사고나면 자기 돈으로 해결하더라구요."
"아..."
"이게 낫겠는가, 저게 낫겠는가, 생각해서 빨리 수습해야지. 20대도 아니고 30대도 아니고 그렇게 처세술이 없어서야 어떻게 살아요."
"몰라요, 저는... 정말 이런 일 처음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어떡해야 돼요?"
남편이 얘기하며 내 앞에서 재연하는데 어찌나 역에 몰두했는지 정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바로 한시간 전에 돈 뜯긴 나는 깔깔대고 웃는다.
"내가 얘기할까요, 그럼."
"네..."
"내 동생이 나이가 있어요. 나이가 들면 이런 일 생겨 어혈 있으면 한약도 지어먹어야 하고.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이 자리에 나오셨냐구요."
"아, 보험으로 한방치료 받으시면 돼요..."
"그건 우리가 할게요. 어느 한방 병원에서나 녹용 넣고 어혈 풀고 그래요."
"네..."
"내 동생도 힘들어요."
남편은 여기서 이제 돈 얘기를 해야겠구나 싶다.
"제가 그럼 20만원...."
나는 이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아니, 저렇게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면 한몫 잡으려고 나온 여자 완전 맘 상할텐데 협상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20만원요? 참나 어이가 없어요. 아니, 약을 지어먹어도 50만원이에요. 약 먹고 치료하면 150에서 200이에요. 아니, 어디 딴 세상 살다 오셨나. 200 정도는 생각하고 나오신 줄 알았는데."
"저 정말 돈이 없어요... 마을 버스 6개월 하면 시내버스로 올려준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200 받으면서 마을버스를 2년이나 했어요. 이제 간신히 시내버스로 승급했는데 수습기간이에요. 회사 사정도 안 좋다고 월급도 제대로 안 나와요..."
"어디 운수예요?"
회사까지 묻다니, 정말 프론데.
"**교통요..."
"그럼 150 주세요. 그걸로 약먹고 치료할게요."
"저희 애가 중학교 1학년인데요, 또래보다 키가 20cm나 작아요... 우리 애 약을 먹여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 먹이고 있어요..."
얼굴 빨개지며 눈물 그렁.
"저는 정말 인생 잘못 산 것 같아요... 제가 너무 한심하네요..."
한참 불쌍한 표정으로 호소하다 남편은 40을 제시한다.
한시간이 넘는 실랑이 끝에, 결국 50만원으로 해결을 봤다. 여자가 자기 계좌번호를 적어주는데 남편이 그거 말고 동생 계좌를 알려달라고 해서 여자가 통화하러 밖으러 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적어주는 계좌의 예금주와 전날 버스 안에서 넘어진 승객 이름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남편은 나에게 전화해 송금해달라고 했다.
분명 최소 150에서 200은 바라고 버스 안에서 데구르르 구르는 신공을 보였을텐데,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여자는 뭔가 홀린 듯 했나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갸웃거리더란다.
"이 얘길 내가 믿어야 하는지...."
그러면서 훈계 한 마디.
"남자는 담대해야 돼요!"
우하하하.
남편은 이리저리 알아보면서 가까운 기사들마저 일일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그랬다더라, 하고 들었던 일들이 실제로 주변에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2년째 버스 운전을 하면서 회사가 기사들을 얼마나 사람 취급도 안 하는지, 얼마나 발톱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 일을 겪으면서 더 분노가 커졌다.
처음에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으나 말았던 것은, 신고해봤자 이 일당들 기록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기본적으로 기사들을 보호할 생각이 전혀 없기에, 기사들이 그냥 울며 겨자먹기로 자기 돈으로 처리하고 마니 기록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사고가 나더라도 회사 손해만 직접적으로 없으면 되니 기사들이 회사에 찍히느니 자기 돈으로 메꾸는 일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CCTV도 있겠다, 사무실에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사 편이 되어 그런 일당들 데이터를 확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 그 여자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그날 홀린 듯 자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냥 저 보험회사에 연락해서 치료 받을게요."
당연히 남편이 그때처럼 저자세로 협상을 하리라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남편은 초짜도 아닌 자신이 순간적으로 당해 생돈을 날렸다는 자책에,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 자체에 대한 미움에, 회사에 대한 분노에, 버스 운전이라는 일로부터 마음이 떠나있던 상태였다.
"네, 그렇게 하세요. 저도 회사에 보고할게요."
남편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자로부터 다시 오는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회사에 사고 보고를 했다.
그 고생을 하고 버티다 시내버스로 승급을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당장의 생계 걱정에 한숨인 나도 아무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나 보험회사로부터는 연락이 오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아무 손해가 없으니 그냥 조용히 넘어가 수습 기간이 지났다. 그래서 나도 지금 이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