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이쓰] 27
바로 이사를 오면서 아내와 함께 작심하고 구입한 책장이다. 아내와 둘이 한참 발품을 팔아 찾은 보물이다. 넉넉한 선반 위에 책들이 가득하다. 한두 칸을 제외하면 거의 다 내 책이다. 그 책장 위에는 과거의 내가 다 꽂혀 있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위해 언제나 응원해 주고 있다.
학창 시절 이후 참 오랜만에 밤새워 읽었던, 울렁거리는 이십 대를 다잡아줬던, 십 대와의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줬던 책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다. 서너 번 넘게 정리해서 기부를 하고 남긴 것들인데도 가득하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다른 물건들은 흐트러져 있으면 너저분해 보이기까지 하다. 언제 꼭 날 잡고 다 정리해 버릴 거야, 하고 벼르기 일쑤다. 그런데 유독. 나의 책장은 그렇지 않다. 그대로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힘이 난다. 완벽한 편애다.
그런 편애를 받는 내 책장은 마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영화관 스크린 같다. 세상의 온 이야기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자그마한 글씨지만 크나큰 영향을 준 이들. 존재감이 없는 듯 하지만 언제고 내 안에서 되살아나는 그들.
언제나 내 안의 자그마한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 수 있다. 수백 명의 작가들이 나에게 손짓을 한다.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한다. 지금도 괜찮다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낸다.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감싸 쥐고 위로를 건넨다.
내 어릴 적. 연탄광에 천장이 넘는 연탄을 가득 채워 넣은 뒤 돼지고기에 쌈을 싸 드시던 아버지의 안도의 미소가 내 얼굴에 번지게 만든다. 나를 울게도 웃게도 만들면서 나랑 같이 살아준다. 나를 울게 만들고 웃게 만들어 주는, 말 없는 튼튼한 가족 같다.
내 최애 가구인 이 책장에는 모든 게 다 있다. 내 인생 모든 게 다 있다. 나를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는 내 인생 지지 특공대들이. 항상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내 생각에 덧칠을 하고, 나의 표정을 관찰하는 눈빛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의 신체적 건강이 정신을 만들어 준다는 아주 오래된 미래를 이제야 깨닫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가져다준다. 당장 멈추고 몸먼저 챙기라고 다그친다. 흔들릴 때마다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렇게 사랑받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일러준다.
그 덕에 오늘도 난 언제나 그랬듯이 가슴속에 커다란 책장을 다 넣고 다닌다. 그 덕에 단단하게 두 발을 내딛는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사람이, 자연이 다 나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방대한 숙제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더 깨닫는다. 그 덕에 오늘 졸업 사진을 찍으려고 모두 다 교복을 챙겨 입고 다 나온 아이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봄꽃보다 훨씬 더 예쁘게 보이는 걸 꺼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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