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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01. 2024

저는 측면 이병땡이랍니다;;

[노랫말싸미] 15

어제 명동 성당을 갔었습니다. 명동을 갈 때면 성당 주차장을 이용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끔 아내와 (마음속) 기도를 드리려 찾곤 합니다. 명동 성당 계단 바로 앞 2500원짜리 드립 커피도 자주 생각이 나고 해서요. 지하 주차장을 나와 지하홀을 통과하는데 다른 주말보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무슨 행사를 하는가 했더니 안쪽 벽면에 커다란 전광판이 반짝였습니다. 어느 (유명한) 신부님의 북콘서트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광판 뒤쪽에 있던 화장실을 다녀 나오다 전광판보다 더욱 화려한(?) 장면을 봤습니다. 바로 수십대의 모니터가 수많은 케이블로 연결된 전광판 뒷면이었죠. 


정면 전광판은 여유로운 하나의 스크린 같아 보였는데 마치 뒤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 치밀함과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뒤따라 나오는 아드님한테 먼저 뒷면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랬더니 단박에 알아보질 못하더군요. 앞에서 전광판을 찍은 사진과 번갈아 보여줬더니 그제야 놀라더군요. 


측면과 정면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유명인이 아닌) 보통의 누군가를 볼 때 바로 보는 경우는 드뭅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제가 위치한 곳과 그(녀)가 위치한 곳은 어긋나 각도를 형성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말은 그(녀)를 쳐다보는 저의 시선 역시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측면은 정면보다 덜 공격적입니다. (서로의 서사가 연결된 좋은) 사이가 아닌 이상 정면은 취미가 아닌 본업이죠. 이해관계를 따져야 하고, 설득을 해야 하고, 설득당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쉬운 사람이라는 걸 들키지 말아야 할 때 취하는.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정면은 측면보다 훨씬 여유가 덜 느껴집니다. 긴장했다는 의미죠. (카메라 렌즈나 특정 누군가의 시선을) 또렷하게 쳐다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으니까요. 특히, 무언가를 얻고 빼앗기지 않아야 할 상대라면 더더욱. 


정면에서 느껴지는 게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카리스마라면 측면은 허용과 포용, 용서가 느껴집니다. 한결 부드럽습니다. 여유가 넘칩니다. 빛이나 조명, 주변의 분위기에 따라서는 정면과 (마치 신기루가 사라지듯) 너무 불일치하는 매력이 느껴질 수도 있죠. 


먹고 사는데서 오는 긴장감은 본질에서 벗어난 사회적 모습을 연출하기 쉽죠. 연출의 말투는 표정이 되고 돈 벌 때와 쉴 때의 (스스로도 가끔 놀라는) 이질감은 당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질감은 어찌 보면 삶을 대하는 처세술 중 하나이지 않을까요? 이질감 자체가 피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 될 없는


우리 어머님은 저를 보고 유명한 배우 이병땡씨를 닮았다고 자주 이야기 하십니다. 결혼 전부터요. 특히, 한때 유명했던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가 나온 뒤에는 더욱이요. 이 사실(?)은 우리 가족은 모두 알고 있지만, 이 글을 혹시 우연하게 읽으시는 분들 중 저를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 불편하실까 봐 '땡'으로 처리했습니다만. 


어머님은 알고 계셨던 게 분명합니다. 사람은 정면보다는 측면이, 측면보다는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요. 사위를 '옆에서 보면 이병땡이야'라고 해놓으시고, 그렇게 정면보다는 측면으로, 속을 다듬으면서 살아내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주눅들지 말고 나만의 꽃을 피우라구요. 



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냐고/나 하나 나 하나 물들어/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냐고/말하지 말아라 말하지 말아라_<나 하나 꽃피어>(이승민) 노랫말중에서



나이가 들면 말만 줄여야 할게 아닌가 봅니다. 우리 어머님처럼 언제나 옆에서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면서 (속으로) 응원하고 (겉으로) 칭찬해야 하는가 봅니다. 항상 저의 옆에 뒤에 계시다 헤어질 때면 어김없이 정면으로 오셔서 허연 백발이 올라앉은 자그마한 가슴속으로 두 팔 벌려 저를 끌어안아주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어머님의 가르침을 스물다섯 해가 다 지나가는 이제야 조금 이해할 듯합니다. 내일부터는 아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고 정신없이 혼자 떠들지 말아야겠습니다. 중간중간 쉬어야겠습니다. 쉴 때마다 더 자주 창밖을 내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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