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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Oct 22. 2024

낙엽같은 아이들

[다들 그렇게 살아요. 뻔한 이유로 행복하게] 12

['다 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당신이고 나이다.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뻔한 이유로 뭉근한 행복을 바라는 당신의 가슴이 나의 등을 밀어주고 나의 가슴이 당신 이 되어 주면서.]




동네를 걷다 늘 지나치는 같은 나무 아래 자주 서게 된다. 몇 번을 올려다본다. 체적으로 아직 초록잎이 더 많은 사이로 하나 둘 변색이 되어 가는 나뭇잎들이 있다.


가만히 올려다 보니 어느 방향 한쪽만 몰려 붙어 물드는 나무도 있고, 초록잎 사이 사이에 홍일점인냥 변색이 되는 나뭇잎도 있다. 같은 줄기인데도 다 제각각인 걸 쳐다보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같은 뿌리에서 새싹으로 태어나 변색이 되기까지 비와 천둥, 태풍과 폭염은 물론 철마다 방충약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보기에도 무서운 전정가위, 전기톱에 가지가 잘려 나가는 걸 함께 하면서 어지지 않고 남아 기어코 낙엽이 되려 한다.


하나하나 당당하게 색깔로, 향기로, 윤기로, 자태로 버티던 시간을 미련 없이  나뭇잎에게,  줄기에게, 나무한테 건네는 위대한 배려와 지속 가능한 생명을 위한 거대한 양보를 느낀다.


며칠 전 차 안에서 횡단보도 붉은 신호등 아래 서있는 여학생 둘을 한참 쳐다봤다. 둘이 서로 얼굴을 한시라도 못 보면 안 되는 듯 빤히 화장기 없는 눈을 맞추며 수다를 떤다. 몇 초면 후다닥 건널 수 있는 짧은 횡단보도 앞에서.


둘이 수다에 빠져 신호가 바뀌는 걸 모르는 건 아닌가, 그러면 살짝 빵빵해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조금 더 키가 낮은 아이가 수다 중에 여전히 붉은 신호등을 눈으로 확인을 한다.


53초. 붉은 신호등위에 줄어드는 신호대기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초록으로 바뀌자, 다시 수다를 떨면서 손을 잡고 터덜거리며 걷는다.  둘의 뒷모습에서 붉은 신호등이 한 200초는 되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다.  


신호를 어기는 아이, 어른, 바쁘게 사라지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어서 그런지 내 마음이 다 평안해졌다. 직진을 하느라 다른 방향으로 그 아이들과 달리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이 낙엽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뭐래도 잎은 낙엽이 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할뿐 크건 작건 반질하건 푸석하건 넓건 좁건 다 이 가을 안에서. 자연의 순서이자 법칙이고 규칙이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 다음해에도 생명을 이어나가는 원칙이다.


교실에서도 낙엽 같은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는 듯 안 하는 듯 하지만 해야 할 것은 시간을 지켜서 한다. 공부를 잘하거나 안 하고, 꾸러기 짓을 하지 않아 주목을 받지만 않을 뿐이다.


낙엽 같은 아이들의 공통점은 낙엽처럼 순리를, 법칙을, 규칙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나서지 않지만 나대지도 않는 아이들. 하지만 한 명 한 명 오래 지켜보면, 이야기 나눠 보면 자기만의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


낙엽이 순리대로, 법칙대로, 규칙대로 나무와 함께 공존할 살 궁리를 하느라 변색이 되는 것처럼, 인간적인 게 기본이고, 질서를 지키는 게 기본이고, 한 만큼 받으려고 하는 태도가 기본인 아이들.


이 아이들이 원칙대로 살 궁리를 잘하면 정말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줘야 한다. 가을을 훨씬 더 많이 경험한 우리들의 몫일 거다. 그래서, 오늘도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가을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고. 억지로 튀지 않아도 계속해서 뛰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잘 살 궁리를 잘 하면 된다고. 러기만 해도 수십억년  동안 제자리에만 있는데도 매일매일 우러러보는 빛을 발하는 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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