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50분
감은 눈 틈으로 눈동자가 아릴 정도의 섬광이 번쩍하고 스며들었다.
A간호사가 병실 전등을 먼저 켜놓고 허공에 외친다. "불 좀 켤게요. 혈압 체크 좀 하겠습니다."
"128에 70이에요. 체온도 정상이시고요."하고 병실을 나가면서 다시 전등불을 끈다.
새벽 06시 10분
A간호사가 다시 왔다. 수액 때문에 왼쪽 팔 위에 꽂아 둔 T자 모양의 주사기 연결고리(간호사들끼리는 '라인'을 잡는다고 표현한다)에 달린 하얀색 밸브를 두 번 정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밸브 밑에 주사기를 직접 꽂은 관 뚜껑을 열고 알코올솜으로 몇 번 닦아낸다. 기침과 가래를 가라앉히는 주사액이라며 주입한다. 30cc 정도 되는 양인데 혈관을 타고 들어가는 느낌도 없이 편안하다.
새벽 06시 30분
B간호사가 혈액 검사를 하러 왔다. 수액 때문에 왼쪽 팔 위에 꽂아 둔 T자 모양의 주사기에서 피를 뽑기 전에 작은 주사기로 주사액을 먼저 투입해 본다. 어제 수액을 맞은 뒤 잠겨 놓은 사이로 혈액이 응고가 되어 주사액이 전혀 주입되지 않는다. 세 번째 시도하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뻗뻗하게 떨린다.
오전 10시 30분
B간호사가 혈압을 체크하고 120에 80입니다. 정상입니다.라고 또박또박 알려준다. B간호사는 A간호사와 다르게 커튼을 걷기 전에 이름을 먼저 부르고 커튼을 열겠다고 미리 알려준다.
오후 1시 15분
C간호사가 혈압, 산소 포화도를 체크하려 왔다. 가장 어려 보이는 간호사다. 짙은 감색 유니폼을 입었던 이전 간호사들과 유니폼이 다르다. 하얀색 간호복에 위에 남색 카디건을 입은 내 머릿속의 전형적인 간호사이다. 어쩌면 올해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스크를 쓰고 들어오지 않은 걸 보고 옆 배드 보호자가 아무 말 없이 건네는 덴탈 마스크를 얼른 받아 끼면서 '아, 마스크. 써야 하는 거죠'라고 혼잣말을 한다.
오후 1시 55분
D간호사가 차트 하나를 들고 커튼을 연다. 목소리가 걸쭉하다. 처음 보는 간호사다. 지금껏 나를 찾아온 간호사 중 가장 경력자인 듯하다. 주사, 혈압 등등 처치를 할 때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불편한 점'만 확인하러 왔다고만 하고는 이내 자리를 떠난다.
오후 15시 30분
C간호사가 주사기를 받쳐 들고 왔다. 새벽에 맞았던 주사액이었다. 기침, 가래를 가라앉히는. 계속 안 들어가서 한참을 확인해 보더니 밴딩해 놓은 주사 바늘이 빠져 있었다.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밴드 안쪽에 피가 살짝 고여 응고되어 있었다. 라인을 다시 잡느라 바늘을 또 찔러야 했다. 여전히 아팠다. 밴드를 가는 동안 고여있던 피가 환자복 상의 앞쪽으로 흘러내렸다. 연신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얼른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오후 16시 50분
C간호사가 저녁약을 가져다주었다.
저녁 8시 26분
D간호사가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려 왔다. 처음 보는 남자 간호사다. '112에 70'이네요 한다.
밤 11시 30분
A간호사가 다시 와서 묻는다. 컨디션은 괜찮은지를. 그러면서 자그마한 주사기로 왼쪽팔에 테이핑 해둔 라인의 밸브를 열고 막아 둔 주입구를 먼저 알코올솜으로 여러 번 문지른다. 주사액을 넣어면서 '아프면 말하세요'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손가락이 떨리지는 않는다.
하루 동안 내가 처치, 확인, 안내받은 간호는 모두 10회였다. 분명 나한테만 이러진 않을 텐데, 담당하는 환자가 10명만 이어도(당연히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을 테지만) 100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처치하고 마무리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얘기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참 고단한 일이다.
이 고단한 간호의 본성은 엄마의 역할이다. 생물학적 의미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로서의 넓은 의미의 엄마이다. 의지가 없거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기. 곁에서 밤낮으로 들여다보며 상태를 확인한다. 먹이고, 갈아주고, 일으켜 세우고, 눕힌다.
원인과 무관하게 환자가 되는 순간, 나이, 성별, 인종, 성향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시, 그 아기가 된다. 엄마 역할을 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실제 엄마가 아니어도, 나이가 어려도 의료적 상황에 맞게 처치할 수 있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엄마가 들어 있으니까.
그런데 간호는 생물학적 엄마의 역할을 뛰어넘는 태도를 지닌다. 바로 이타심이다. 아기를 낳은 엄마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식'에 대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평생 처음 보는, 다시 보지 않을 타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엊그제 나의 수시 면접팀에 속한 워니(열아홉 남자 사람)가 모 대학 간호과에 최종 합격을 했다. 간호과만 찾아 썼는데, 첫 대학부터 좋은 결과를 냈다. 워니의 마음속에는 아직 이타적인 엄마의 마음이 충분하지는 못하겠지만, '아가'를 돌보는 마음으로 잘 해내기를 응원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A가 싫어서 B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B가 하고 싶어서 선택을 해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미를 좇을 수 있는 게 세상 이치다. 간호는 엄마가 되고자 하는 선택처럼 절대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확신이 서야만 가능하다.
누군가의 영혼을 지배하는 몸을 치료하는 일은 그 사람의 인생 여정에 깊숙히, 중요하게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대 수명이 더 늘어나고, 건강 수명 기간이 삶의 질의 본질이 되어 갈수록 더욱 그렇다. 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아픈) 아기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