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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92병동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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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20. 2024

아내들

[92병동 일지]3

'아이야아', '아~야', '아이~야', '아야~'


내가 잠에 빠져든 잠깐을 제외하곤 거의 24시간 들리는 바로 옆 환자의 신음 소리이다. 커튼으로 가려진 77세의 환자로 코줄을 한 채 내내 누워만 있다. 이 환자의 맞은편 자리 67세의 환자 역시 코줄을 하고 있다.


67세 환자는 상주하는 보호자가 자주 커튼을 열어 놓아 침대에 기대앉은 듯한 모습이 몇 번 보였, 가래 끓는 바튼 기침을 연속을 할 뿐 신음소리 대신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가끔 들렸다.


두 환자는 모두 상주하는 보호자가 아내였고, 그녀들도 60~70대의 고령으로 보였다. 대소변을 받아 내고, 침대시트와 기저귀를 갈고, 끓어오르는 가래를 뽑아내는 일들을 그녀들은 신음 없이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꽤나 자주 상대방의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전해지도록 통화를 하고, 서로 크고 작은 정보를 나누고, 서로의 남편 상태를 공유하는 대화를 내가 없는 듯하는 정도가 하루 중 남편이 아닌 자신에게 쓰는 시간쯤으로 보였다.


들려서 알게 된 사실. 그녀들의 가장 큰 목표가 남편들의 완치가 아니었다. 둘 다 쉽지 않겠다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코줄만 빼고 스스로 좀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재활 병원을 거쳐 요양 병원으로 옮기는 거였다.


그들과 그녀들을 뒤로하고 나는 주치의의 권유보다 하루 반나절 일찍 퇴원을 했다. 몸을 가득 채운 듯한 기침, 가래를 삭이느라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감는 항생제에 처지는 몸이지만 잠을 충분히 못 자기 때문이었다.


잠은 빼앗겼지만 대신 평생을 함께 했을 그들의 삶의 끝자락에서 병든 남편의 수족이 되어 주는 고령의 아내들이 정말 위대하다는 사실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저 위대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24시간 남편을 떠나지 않고, 밥도 잠도 항상 옆에서 해결하면서 남편들을 아기 대하듯 소곤거리는 아내들. '그랬어? 아파? 알았어..' '자 00 씨 이렇게 해볼까요. 하나, 둘, 어차.' '오늘은 어제보다 더 잘했어요. 잘했어'


'살살해? 알았어요~ 어, 하하. 일부러 힘 더 주는 거지?. 자 여기, 어, 여기에 올려요. 이걸 잡으세요.' 하면서 남편을 영혼으로 안아주는 그녀들의 어둑하지만 깊숙한 눈빛이 커튼 너머로 보이는 듯 하늘거렸다.


그러다 들린 둘의 대화 중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말.


'아파 누운 늙은 남편 옆에는 아내가 있지만, 아파 누운 젊은 남편 옆에는 엄마가 있다'


아마 오랜 병시중을 하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늙은 아내들끼리 시어머니, 친정 엄마, 엄마, 아내라는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만들어 낸 말인 듯했다. 자조 섞인 푸념으로도 들렸다.


67세 환자의 아내가 '젊은 아내들은 돈 벌어야 병원비를 대니까'라고 77세의 의견에 슬쩍 타박을 하는 듯했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고된 처지가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는 남편들에 비해 낫다,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커튼을 흔들며 들리는 그녀들의 대화에 어느 순간 나의 마음도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끼니마다 전화하고 톡을 보내는 아내가 떠올랐다. 항생제 덕분에 더욱 노곤했지만 생각만큼은 또렷해졌다.


'부부는 비슷한 속도로 익어가야 한다.'

 

어느 한쪽이 먼저, 너무 아프면 안 된다. 특히, 아내가 먼저 아프면 안 된다. 남편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무엇보다 남자들 병실에 아내들은 상주할 수 있지만 여자들 병실에서 남편들은 같이 생활할 수 없다.


말이 안 되지만 입원해 보니 현실이었다. 비슷한 속도로 주름지고, 느릿해지고, 비슷한 마음으로 비슷한 세상을 같이 바라보는 것. 부부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는 것을 수많은 지인들이 이미 보여줬고,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잊고 있었다.


내 전화기 속 아내의 전화번호 앞에 저장된 이름은 '내 안님'이다. 여러 번 바뀌다 최종 저장된 이름이다. 표현하는 사랑이 넘쳐나거나 아첨용이어서가 아니다.


해를 넘게 살면서 내린 결론이다. 아내는 내 안에 언제나 들어와 있다. 나보다 나를, 나의 생각을 잘 안다. 아니, 다 안다. 그녀를 통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분좋게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그렇다. 지금과 같은 건강한 내 삶을, 나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10중 5는, 아니 6, 7은 아내로부터 나온다.   


먹는 것, 입는 것, 돈 벌고 쓰는 것, 남매 키우면서 결정을, 마음 방향을 잡는데 작동한 방법과 지혜의 시작은 아침에도, 낮에도, 새벽에도, 한파속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아내로부터였다.  


쉬운 일을 어려운 말로는 잘하는 남편(들) 에 비해  어려운 일들도 쉽게, 쉽게 동시에 여러 가지를 직접 몸과 마음으로 해내는 게 아내(들)이다. 쉬울 리만 없는 세상사 수많은 일들을 말이다. 진짜 겁없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마치 여러 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자그마한 심장 주변에다 온 가족의 큼지막한 심장을 붙여 달고 항상 다니듯이. 그렇게 자신의 생명력을 가족들에게 불어 넣어 주고 있다. 따지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남편(들)이 아이였을 때 챙겨 (못)받았던 엄마의 역할을 남편이 엄마로부터 멀어지면서 신이 보낸 또 다른 엄마가 아내(들)인 게 분명하다. 물리적인 나이에 관계없이 언제나 다른 경지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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