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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Nov 05. 2022

킹 받네

어제, 오늘 꽤 바람이 차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가을 깊숙이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반려견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에도, 부모님이 운동하시는 길목에도 가을들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가을 위를 달려 나가고, 어른들은 그 위에서 아래에서 가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그렇게 쓸어도 쓸어도 가을은 넘쳐난다. 가을 나뭇잎은 넘쳐난다.

우리 아파트 단지 곳곳에도 가을을 쓸어 담은 커다란 비닐봉지가 가지런히 모여 있다. 은퇴하시고 십여 년을 넘게 다른 곳,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가을은 그래서 반갑지만은 않을 거다. 하지만, 또 그 나뭇잎 덕분에 멀리 안 가고도 가을이 깊어 가는 걸, 느끼신다고 한다, 간혹. 겨울철 눈보다는 몇 배 낫다고 하시면서.


요즘 매일같이 두세 시간을 대중교통을 타고 공부를 하러 다니느라 피곤한 열여덟, 딸이 가끔 묻는다.

'아빠, 나 이뻐'하고. 그래서 '이쁘지'라는 대답 대신  표정으로 장난을 걸면  그런다.

'아빠, 표정이? 아 킹 받네'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휴대폰을 가지고 놀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 그런다. '아 킹 받네'.

업무상 10대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자기들끼리 만들어 쓰는  줄임말이 거의 홍수 수준이다. 그리고 그 줄임말의 대부분이 '어줄단'이다. 어거지로 줄인 단어들! 아이들한테 설명할 때 쓰는, 내가 애들한테 맞춰보라고  물아보는, 줄인 말이다. 그러면서 '너희도 모르지?'를 속으로 외쳐볼 때 쓰는 말이다. 꼰대의 도전이다,  


'선생님, 너무 억울해요'라고 학생들이 가끔 하소연할 때가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화의 끝에서  살짝 건네주며 토닥이는 말은 '살다 보면 억울한 게 더 많아'  위로도 격려도 아니다, 분명. 하지만 듣는 이도 알고 있다. 단단해지라는 말이라는 것을. 그럴 때 킹 받네 하고 넘어가란 말이라는 것을. 잘 넘어가야 다음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을. 그래서 10대들이 요즘 킹 받는다는 표현은 참 가볍게, 짧게  자신의 감정을, 상황을 넌지시 표현하는 솔직한 말이다. 속으로 아니고 겉으로 삐치는 말이다.

 

교실에는 가끔 교과서보다 정확하고 교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학생들이 있다. 올해도 우리 반에 두 명이 있다. 바른생활 이 몸에 뵌 아이들이다. 기특하고 대견하다. 요즘 보기 드문 아이들이다. 그중 한 아이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아마 무의식 중에 'X나'라는 아주 흔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남녀 학생 대여섯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그 학생은 1초도 되지 않아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툭 쳤다. 물론 다른 학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한 아이다. 다 가도, 혼자 남아 자기 역할을 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고, 말투며, 인사며, 게다가 공부까지 열심히 하는 그런 아이다. 그 아이가 어제 무리들 속에서 장난치면서 농담을 하는 중에 까불까불 거리는 남학생한테, 웃으면서 '아, 킹 받네'라고 받아쳤다. 역시 무리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남학생 역시 웃으면서 넘겼다. 


그런데, 그걸 우연하게 듣고, 지켜본 내가 왜 그리 흐뭇(?)한 지. 나의 그때의 모습이 아주 살짝 겹쳐져서 그랬겠다, 아들이 초중고 다닐 때 모습이 많이 겹쳐져서 그렜겠다 싶으면서도, 킹 받네라고 퉁치면서 지나가는 여유가 부러워서 그랬겠다 싶다.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목숨까지 걸 것 같은 사람들을 자주, 그런 나 자신을 가끔 접하게 된다. 


요즘 더욱 화나고, 짜증 나고, 열받지만 '킹 받네'하고 자기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의 눈보다 훨씬 덜 힘든 가을 나뭇잎으로 콧노래와 함께 걷어 담는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10대들이 쓰는 어줄단중에 나에게 가장 희열(?)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뉘앙스가 기특하다. 귀엽다. 사회성이 높다. 자기 회복력이 깊다. 오늘도 화내고, 열받고, 스스로 짜증 내지 말고 '킹 받네'하고 슬쩍 넘어가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감정을 살짝 표현하고, 조절하면서 이 가을을 잘 이겨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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