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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Feb 08. 2023

왜 커피일까?

아직 후각보다 미각이 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요천이인 아내는 음식을 맛나게 합니다. 그리고 식신이 - 식사 때마다 싹싹 비우는 저를 고마워하는 아내의 입장에서 - 저는 맛난 냄새에 흥분하면서 오늘도 맛나게 먹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저도 공통적으로 미각과 후각을 모두 잃어버린 음식이 있네요. 그게 커피입니다. 코로나 감염 이후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 향도 맛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지만, 다시 커피 향이 기분을 좋게 만들고, 목으로 넘어가는 커피맛에 피곤을 내려놓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커피일까 하고. 물론 의학적인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라기보다는 밋밋하지만 건강한 일상 속에서 커피의 역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오래전에 써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 보게 됩니다.




  그저께, 어제 두통이 심했습니다. 머릿속에서 큰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는 것 같았습니다. 관자놀이 주변이 힘껏 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두통은 업무를 볼 때도 따라다녔습니다. 아침 두통이 오후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에도, 운전 중에도 머릿속에서 덜그덕거렸습니다. 지금껏 처음 느껴보는, 지속적인 두통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손가락으로 자주 눌렀나 봅니다. 앞에 앉으신 분이 물었습니다. '부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두통이 있으신가 봐요?'라고. 그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묻습니다.


  "오늘 아침에 커피 드셨어요?"


  그때 알았습니다. 수요일, 목요일 아침에 커피를 마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을. 출근하자마자 루틴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날이 있지요. 그럴 경우 대부분의 원인은 묵혀두었던 업무가 아니라 갑자기 순서를 치고 들어오는 것들에 있을 때가 많잖아요. 평소에는 출근하면 제일 먼저 사무실 창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원두를 갊니다. 타다닥, 윙하면서 분쇄기가 돌아갑니다. 아담한 사무실을 금방 원두향이 가득 채웁니다. 똑똑똑, 쪼르륵 떨어지는 원두 소리에 아침잠이 좀 더 달아납니다. 그 향과 그 소리는 또 하루의 아침을 알리는 나만의 의식입니다. 귀와 코가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시작입니다. 작년에는 주변에서 '커피맛을 잃으면' 코로나에 걸린 거라고 농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앞에 계신 분의 통찰력(?) 덕분에 저의 두통의 원인을 전혀 의외의 것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본인이 두통의 원인을 찾아보던 중 '카페인 중독' 증상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페인 중독'이라고 검색을 해봤습니다. 첫 번째 증상에 떡하니 두통이 있더군요. 기사는 카페인 중독 셀프 체크 리스트로 연결되었습니다. 문항이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안절부절못함 ▲신경질적이거나 예민함 ▲흥분 ▲불면 ▲얼굴 홍조 ▲잦은 소변 혹은 소변량 과다 ▲소화불량 등의 위장장애 ▲두서없는 사고와 언어 ▲근육경련 ▲주의 산만 ▲지칠 줄 모름 ▲맥박이 빨라지거나 불규칙함


  12개 중에서 5개 이상의 증상이 체크되면, 카페인 중독을 의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단순히 두통만 있으니 카페인 중독은 아닌가 봅니다, 만 500mm가 채 안 되는 머그컵 한잔이 하루 섭취량인데 조금 더 줄여야 할까 봅니다. 하지만 커피는 좋은 영향도 많습니다. 적당량을 섭취하면, 심장과 간에 도움이 되고, 규칙적인 배변활동에도 큰 도움을 받습니다. 그것보다도 저에게는 더 큰, 아주 좋은 영향을 주는 커피가 있습니다. 매우 행복한 영향 말이지요.


  장인 어른댁을 가면 여러 가지로 행복해집니다. 즐겁습니다. 우선은 집밥을 만들어 주십니다. 물론 집에서도 집밥을 자주 먹습니다만, 스케일이 다른 집밥이지요. 여든이 가까운 장모님은 요즘은 잘 못 만나보는 '고봉밥'을 주십니다. 그 밥을 절반 정도 먹고 있으면, 얼른 먹고 더 먹으라 하십니다. 아내가 옆에서 엄마한테 눈짓을 줍니다만. 장모님 고봉밥은 언제나 밥만 먹어도 바로 건강해질 듯한 오곡, 육곡의 잡곡밥입니다. 그래서 댁에 도착하기 전에는 최대한 속을 비우고 가려고 합니다.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지요. 고봉밥에 따라 나오는 찬은 백종원 님도 울고 갈 메뉴들입니다. 부드럽고 달달해서 뼈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아먹게 만드는 소갈비찜, 걸쭉하게 매콤한 잡탕찌개, 파삭한 단맛의 고추튀김, 앞마당에서 수확해 짭조름하게 무친 고춧잎 무침, 우리 남매들이 넘버원을 외치면서 먹는 양념게장, 쫀득 고소함에 물컹한 느낌이 잘 어울리는 고추 멸치볶음, 칼칼하게 속 시원한 물김치, 씹으면서도 달달한 침이 입속 가득 고이는 배추 겉절이, 겉절이 같이 살아 있는 부추무침, 아삭하고 투명한 무채, 씹히는 맛이 꼬들 거리는 무말랭이, 이 모든 것들을 싸서 먹을 수 있는 고소한 생김 등등.  


  밥상을 물리고 나면, 장모님은 자꾸 저를 재우려고 하십니다. 운전하기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라고 재촉하십니다. 안 막히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장모님 댁 가운데 방은 정말 잠이 잘 옵니다. 적당히 어둡고, 가다 서다를 하는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백색소음으로 잠을 재촉합니다. 놀다 자다 하다 보면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의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노란 커피 타임이지요. 평소에는 안 먹지만, 장모님 댁에서는 먹습니다. 너무 달콤하고 행복한 일탈입니다. 두 분 모두 손님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 사위의 안전귀가를 바라는 마지막 의식처럼 말이죠. 말씀은 장모님이 먼저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내 장인어른이 묻습니다.


"윤 서방, 커피 마셔?"라고.


  올해 여든이신 장인어른은 보청기를 끼고 계셔서 처음 들으면 화내는 듯 목청이 크십니다. 저에겐 그 외침이 엄청나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요즘 힘들지? 몸 잘 챙기고, 건강하게 생활해. 너무 애쓰지 말고. 잠도 푹 자고. 시간 지나면 다 이해될 거야. 고비를 잘 넘겨. 지금껏 살아보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살아볼 만 해. 찬찬히 해'라고 속삭여주는 목소리입니다.


"사람, 참. 바쁜 데 왜 왔어?" 하십니다.


"길 막히는데, 어서 가!" 하십니다.


  그 사이에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십니다. 다 큰 손녀딸한테 장난을 치면서 옅은 미소만 짓습니다. 몇 시간을 있어도, 잠을 자고 와도 비슷합니다. 어둑한 중간방에서 따로 TV를 보시거나, 라디오를 들으십니다. 그러다가도 마지막 의식은 꼭 챙기십니다. 바로 '노란 커피'를 손수 타 주시는 겁니다. 어떻게 아시는지, 방에 계시다가도 어느새 노란 커피를 두 개 들고 거실로 나오십니다. 식탁에 혼자 앉아 천천히 노란 커피를 뜯어냅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안방 문 옆 콘센트에 포트를 꽂습니다. 물이 끓는 동안 식탁 위 두 개의 컵을 거실 바닥으로 가지고 내려오십니다. 그런 후 물끄러미 포트 버튼 밑에 투명하게 보이는 물이 요동치는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보십니다. 탁하고 버튼이 위로 튕기면, 다시 한번 옅은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리고는 포트를 들고 컵에 물을 천천히 붓습니다. 아주 천천히. 당신은 물을 한강으로 넣고, 저는 반 컵만 넣어 주십니다. '싱겁게 먹어?'하고 20여 년 전 물어보신 뒤 지금은 묻지 않고 하십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티스푼으로 컵 깊숙이 휘젔습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정성껏. 그리고는 저에게 건네주십니다.


  장인어른과 제가 별 이야기 없이 노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다시 이별을 준비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주섬주섬 옷을 입으면서 휴대폰을 챙깁니다. 화장실에 들렸다 나옵니다. 발 빠른 작은딸은 외할아버지와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그러는 동안 장모님은 부엌에서 아까 밥상 위에 올라왔던 찬들을 봉지봉지 담으십니다. 아내와 타협을 통해 우리 집으로 옮겨 갈 찬들이 결정됩니다. 가끔은 장모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부엌에서 안방으로 먼저 날아듭니다. '아범, 이거 먹을 거지?'하고. 그럴 때는 보통 타협에 실패했을 때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식구들이 잠들었을 때도 외롭지 않습니다. 졸리지 않습니다. 입안에는 달달한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입속에서 혀를 굴리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흥얼거립니다. 쉬고 있는 왼쪽 발바닥으로 비트를 맞춥니다. 핸들 위에서 손가락이 수줍게 춤을 춥니다. 깜빡하고 깜빡거리지 않고 차선을 넘어오는 차들이 용서가 됩니다. 미안하다고 비상등을 켜주지 않아도 흥분되지 않습니다. 집에 도착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올려 보낸 후, 지하주차장을 나오면서 전화를 합니다.


'어머니, 저희 방금 도착 잘했어요. 잘 먹고 잘 놀다 왔습니다'.  


  하늘에 총총거리는 별들이, 딸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달빛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명. 일 년에 몇 번 마시는 '노란 커피'가 매일 마시는 원두보다 더 빨리 중독된 결과입니다. 무한한 행복을 만드는 노란 커피의 힘입니다.




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내 몸에 수분이 충분할 때 커피 향이 더 달고 커피맛이 더 진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재개발에 밀려 여관촌 옆 빌라 2층에 한시적인 거주를 하시는 부모님. 마당도 내어주고 가운데 작은 방도 사라져, 이제는 그때의 노란 커피맛을 다시금 느끼지는 못할 듯합니다. 미각이 다 돌아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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