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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03. 2023

꽃할매와의 만남

사진: Unsplash의Magda Pawluczuk

페퍼포그에서 지랄탄, 사과탄이 날아들던 오후. 나는 언덕을 내려와 후문을 빠져나왔다. 후문 초소 뒤에 우뚝 솟아 있던 목련이 이미 다 저버려 돌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오른쪽 옆 아파트 단지에서 넘어와 축 늘어진 수양버들이 내 등을 간지럽혔다. 야, 지금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후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짤막한 청자켓을 입고 있던 앳된 얼굴의 청년 둘셋이 나에게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눈알을 부라렸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는 건 이제 만했다. 벌써 5월이 시작되었으니까. 신분증 검사. 가방 검사. 뭐, 대학생이 되고 나서 두어 달 동안 환영식처럼 겪은 일이라 그날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나? 뭐? 볼 거 없으니까 다 볼 테면 봐. 니들이 내 머릿속까지는 못 들여다볼 테니까, 정도로 대했다.


난 지금도 페퍼민트 차는 싫어한다. 맛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름 때문에. 페퍼민트는 잘못이 없다. 그냥 원래, 먼저 그 이름이었을 텐데. 선택적 트라우마다. 무지막지한 페퍼포그의 허연 불구멍의 기억 때문에. 후문밖에서 그놈이 컥컥컥컥 거리면 그 높은 사범대 건물 마당으로 파바박 쉬리릭 거리면서 떨어져서 노르스름하게 하얀 연기를 뿜어내면서 지랄한다. 맞다. 그게 지랄이다. 가만히 있지 않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가랑이 쩍쩍 벌리듯이 이리저리 갈지 자로 휘돌아 치는 꼴이. 입틀막으로는 부족하다. 입코눈 틀막을 억지로 하고 그놈 반대쪽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뛰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시커먼 페퍼포그는 늠름한 척 폼을 잡고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검은 가죽잠바를 입고 새빨간 핏물을 질질 흘리면서 소고기를 생으로 질겅거리는 놈 같았다.


그놈 덕분에 후문에 쌓아 놓은 폐목재, 가구, 철제 의자 등의 바리케이드에 불이 붙어 소방차가 출동한 지 한두 주 지난 뒤였다. 철문은 원래 검은색이라 티가 나질 않았지만, 경비초소 벽, 대리석 바닥이 검게 그을린 자국은 여전했다. 미대생들이 내려와 큰 붓을 들고 먹물을 발라 작품을 만들었나 싶었다. 그렇게 가방 검사를 당하고 터덜터덜 서점 앞 사거리를 지나쳤다. 모두가 평화로웠다. 다음 주에 주르륵 무슨 날, 무슨 날이 기다리고 있던 5월 시작 무렵,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골목을 내려와 큰길로 툭 튀어나오듯 나오면 스포츠 신문 파는 가판대가 있다. 극장이 바로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몫이 좋은 자리다. 거기서 지하철을 타기 전 가끔 하나 사들고 지하로 내려가곤 한다. 가난하면서 앞뒤 막힌(?) 대학생이어서 어그로 장난이 아닌 값비싼 선데이 서울 옆에 나란히 있는 사백 원 짜리 스포츠 신문을 하나 사들면, 한 시간 넘게 서서 달리는 지하철이 금세 달려갈 수 있다. 그날도 그러려고 그랬다. 좋아하는 선배가 좋아하는 야구 소식을 그렇게 접할 수 있다. 그 선배와 야구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나누고 싶어서. 그런데 그 신문 가판대 옆에 또 하나의 리어카가 붙어 있었다. 두 달여 동안 한 번도 못 본 노점상이었다. 갑자기 생긴. 시기집중형 노점상. 바로 꽃을 파는 리어카였다. 얼마 뒤 스승의 날, 어버이날을 겨냥한 이동식 꽃집이었다.

1991년 5월 19일자(출처:bookst)


그때는 노점상이 불법이 아닐 때였다. 아니 불법이었지만 본격적인 단속은 하지 않을 때였다. 아, 같지 먹고살아야지 가 통했던 시절이었던 거다. 그날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게 얇은 비닐이 덧씌워진 그 리어카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하지만 여자 친구는 고사하고 대화할 상대도 없었던 내가 꽃을 사야 할 이유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것보다 옥탑방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기도. 그렇게 며칠을 - 아마 거의 일주일 내내였던 것 같다 - 지나다니는 동안 꽃리어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뒤. 골목 안 맥주집 앞을 지나칠 때쯤, 꽃리어카 있는 도로변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먼저 골목 안으로 달려들어와 나를 감쌌다.


그 소음에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더 빨리 큰 도로변 인도로 튕겨 나갔다. 그랬더니 꽃리어카 앞 인도에 리어카 위에 있어야 할 장미, 카네이션, 프리지어, 안개꽃 그리고 이름 모를 알록달록한 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사람들은 지나쳐 가고 있었다. 꽃리어카 주인 할매의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이마와 눈 주변에 깊게 파인 주름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목처럼 출렁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 목은 왜 주름이 거의 없지 란 생각을 혼자 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인도에서 주섬주섬 꽃을 주워 들어 리어카 위에 쌓아 놓고 있었다. 할매는 그런 나를 슬쩍슬쩍 흘겨봤다.

(내일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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