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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04. 2023

나를 꽃으로 만들어 준 꽃할매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743 에서 이어집니다)



꽃리어카 맞은편에 약국이 있다. 그리고 그 약국 바로 옆에 동물병원. 그리고 그 옆에 꽃가게가 있었던 사실을 할매가 소리소리 지르는 방향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 그 집 이층에서 우리 신입생 회식을 했던 거구나 하고. 꽃할매는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꽃가게와 한판을 한 거였다. 그리고 그 꽃들은 아마도 꽃할매가 셀프로 알아서 바닥에 내다 꽂은 것들이겠다 짐작이 갔다. 꽃집에서 빼꼼히 내다보는 젊은 여자분의 얼굴이 더 상기되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경찰차가 리어카 뒤쪽으로 막 도착을 했지만 꽃할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육두문자를 날리고 있었다. 그 꽃집 아가씨한테, 허공에, 행인들한테 그리고 나한테. 


그런데 그 표정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악다구니였다. 쎄지 않은 데 쎈 척하려는. 뚝뚝 거리는 것 같은 깡한 몸으로 그래 그래 어쩔 거야, 나 죽고 너 죽자, 먹고살아야는 할 거 아냐, 그런데 나는 이것밖에 할 게 없다고, 나도 돈 있으면 가게 안에서 편하게 장사하지, 나는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어쩌라는 거야, 마음대로 해봐, 해보라고, 내가 죽으면 그만이지, 뭐, 뭐,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이었다. 작은 눈을 일부러 크게 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마디로 발연기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남자 경찰관 둘도 익숙하다는 듯 꽃할매가 쏟아내는 동안 끼어들지 않았다. 얼마뒤 할매와 리어카는 경찰관들을 뒤로하고 지하철 입구 옆 골목길로 터덜거리면서 걸어 들어갔다. 그 골목은 꽃리어카와 할매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진공청소기 주둥이 같았다.  


그다음 날 수업을 받으러 가면서 리어카가 있던 바닥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흔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가로수 밑동을 둘러싸고 있는 철판 보호대 틈 사이에 서너 장의 꽃잎들이 구겨져 끼어 있었다. 누군가가 잘 쓸어 모아둔 것 같았다. 마치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은 어제의 증거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이 다 되어가는 늦은 오후.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데 할매의 꽃리어카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히 나 혼자 반가웠다. 봄비가 가랑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꽃리어카에 둘러쳐진 비닐 바깥쪽으로 빗방울이 잠깐 멈췄다 또로로록 하고 연신 흘러내렸다. 빗방울이 할매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 같았다. 나는 그 비닐을 들어 제치면서 꽃리어카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와, 학생, 꽃 살 거야, 찬찬히 골라 봐, 여자 친구한테 아니면 부모님 선물, 어버이날 선물은 꽃이 있어야지, 다발로 줄까 송이로 줄까, 화분도 있어. 들어선 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렇게 나를 향해 마구 쏘아 붙이듯 말을 걸어왔다. 속도는 어제 같았지만 억양은 나긋나긋했다. 손과 눈은 꽃다발을 만들면서 입만 그렇게. 서너 개의 백열등 아래 비친 꽃할매의 얼굴은 뿌연 파우더가 눈가, 입가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잔주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한 번에 쓰윽 바른 듯한 빨간 립스틱, 너무 진하게 한 줄로 긋듯이 한 눈썹에 내 시선이 닿았다 떨어졌다. 세수도 안 하고 화장을 한 개구진 여자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건 연민이었다. 짠한 마음. 서울살이 두 달째인 시골 촌놈이 가진 모자란 연민. 다 불쌍해 보이고, 다 나 같아 보이는 일방적인 연민. 


그 연민의 끝은 결국 꽃할매의 언변에 꾐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몇 마디를 주고받지 않았던 거 같다. 결국 꽃은 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주 다음 주 내가 바빠져서 걱정이었는데, 잘되었네 학생. 여기 이 앞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그럼, 어버이날 전날 딱 하루 아르바이트 좀 해줄 수 있을까. 하루 일당은 넉넉하게 줄꺼이니, 아, 네. 알바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한다, 시급 - 아 그때는 물론 시급이란 표현이 없었다 - 이 얼마, 뭐 이런 이야기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길거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꽃 파는 아르바이트. 결코 세련미와 멋짐이 1도 없던 절정 노안의 내가. 그 무렵이었을 거다. 복도를 걸어가는 데 선배가 선배인 줄 알고 인사를 먼저 했던 게. 


1991년 5월 17일.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 당시는 토요일도 온 세상이 일을 하던 때였다. 불금이란 말이 없을 때였다. 약속한 시간에 약국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진공청소기 주둥이 같은 골목 안에서 할매와 리어카가 툭 하고 미끄러져 나왔다. 마치 무대뒤에서 기다렸다가 '액션'하고 시작되는 듯이. 할매는 꾸벅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판대 옆 가로수 아래 꽃리어카를 멈췄다. 바퀴 양쪽에 목침같이 생긴 나무를 받쳤다. 살보다 핏줄이 더 많은 것 같은 쪼글거리는 발등이 훤히 드러난 그 발로 툭툭 차서 넣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마치 숨도 쉬지 않는 듯 매우 익숙하게. 할매 뒤로는 연신 자동차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갔다. 버스가 방귀를  퓌웅 퓌웅 거리면서 내달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대각선 꽃집을 힐끔거렸다. 


그날 나와 꽃할매는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꽃을 팔았다. 노란 장판이 깔린 리어카 위에 카네이션 서너 개 남겨 놓고. 할매는 연신 나에게 다 내 덕이라고 했다. 보기(?) 보다 다르다고도 했다. 장사를 정말 잘한다고 했다. 말을 그렇게 잘하냐면서.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가 하면서. 친구들보다는 두 달 동안 가까워진 선배들에게 꽃알바를 한다는 말은 했었다. 그 덕을 조금 보긴 했지만. 여전히 스포츠 신문 하나를 돌돌 말아 들고 다니던 그 선배도 꽃을 샀다.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카네이션 바구니를 하나 사줬다. 나중에 보니 우리 아지트였던 그 형 하숙방 비디오 레코드 위에 덩그러니 올라가 말라 있었다.  


내가 평생 처음 직접 돈을 번 날이었다. 20만 원. 늘상 돈이 부족했던 스무 살, 서울살이.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꽃알바를 하면서 두 가지의 '시작'이 나의 이십 대를 먹여 살렸던 것 같다. 하나는 알바를 계속하자. 돈 버는 거 재미있다. 그때부터였다. 스물일곱. 따박따박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나의 알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단지 배포, 호프집 서빙, 과외 - 는 동시에 세 군데를 한 달도 있었다 -, 00 랜드 구내식당 쟁반 배달, 문서 타이핑 - 이때 한글, 영문 키보드를 외운 덕분에 지금도 1분에 500-600타를 친다 -, ㄱㅂ문고 증축 공사 막노동 - 가끔 갈 때마다 나 혼자 흐뭇하다 - , ㅈㄹ백화점 이벤트물 야간 설치 작업, ㅈㄹ학원 전국모의고사 채점, ㅎㄱㄹ신문 새벽배달, 학교 중도-중앙도서관- 근로장학생, 감사원 ㄱ체조 강사.

(그 이후 나는 아내도 인정하는 알바의 신(!)이 되었다. 그 이야기는 꼭 한 번은 글로 정리해 보고 싶다. 한 권의 책이 나올 듯ㅎㅎ)


그리고 나의 이십 대를 먹여 살린 두 번째 '시작'. 가랑비가 내리는 어슴푸레한 저녁이었지만 참 손님이 많았다. 꽃을 사려고 얇은 비닐을 들추면서 리어카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행복했다. 기쁨이 넘쳐흘렀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서울사람들(?)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가장 많이 본 날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그런 얼굴만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나이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웠던 꽃할매는 꽃을 파는 내내 꽃다운 내 나이가 부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무슨 일을 하건 정말 잘 해낼 거라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릴라샘이 해준 작별인사처럼. 꽃장사를 하는 이유가 이쁘지 않은 자기 인생을 이쁜 꽃으로라도 지우고 싶은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일찍부터 꽃으로 살라고 했다. 그렇게 살라고 했다.


대학생이 된 지 두 달 지난 스무 살. 꽃으로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건지를 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였다, 분명.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게. 내가 주인공처럼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건지에 대해. 그렇지만 막연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게 꽃할매가 말한 꽃으로 살으라는 그 말이지 싶었다. 우연히 만난 꽃할매 덕분에 스무 살에는 어울리지 않은 정신적 노안까지 찾아온 거다. 물론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꽃으로 살으라는 꽃할매의 당부를 잘 지켜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싶은 에너지가 아마 그 가판대 옆 꽃리어카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스무 살의 나에게 딱 한 가지 조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꽃을 산다는 건 꽃을 받을 사람을 염두에 두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꽃을 받고 기뻐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내가 용서되고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어서 내가 행복해지는 거라는 것을. 


이번주, 다음 주 온 세상이 꽃 천지일 거다. 자기 뿌리에 매달렸던 꽃들이 이제는 예쁜 용기에 담겨 어디론가 줄지어 움직일 거다. 낮에도 밤에도. 비가 와도 햇살이 넘쳐도. 손에 들려, 차에 실려, 바람에 날려. 손에 웃고 차도 흔들거리고 바람도 신나 좋고. 그렇게 꽃을 전해주는 그 마음으로 잘 살아내려는 용기를 다짐하는 꽃 같은 5월이 모두에게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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