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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희 Nov 07. 2023

식판 한 상

나는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실 먹는 것을 막 즐겨하는 편은 아니어서 요리의 재미를 느끼기엔 아는 것도 아는 맛도 적은 편이었다. 기분이 좋은 날이든, 기분이  다운되는 날이든 그저 아이스 바닐라 라테 한 잔이면 먹는 즐거움을 모두 다 채워버릴 수 있기에 먹는 것에 있어선 정말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약 1년 전부터는 매일 아침 주방에서 한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인 것 같은 이 루틴은 우리 아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기의 이유식을 시작하며 나는 많은 도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요리교실과 같은 모습으로 처음엔 쌀로 미음 한 그릇 만드는데 2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2시간이면 아기 반찬 몇 개는 뚝딱 만들어 놓을 자신이 있다.


얼마 전, 어색하면서도 익숙해지는 이 요리 시간에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이 올라왔다. 요리는 정성이라 하는데, 정성이 들어가려면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10분만 늦게 일어나도, 이 요리시간에 차질이 생겨 마음이 급해지고 시간도 급하고 아기를 위해 만드는 요리가 '짐'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반대로 10분만 일찍 시작하면, 아기를 위한 건강백과사전처럼 재료 하나하나의 성분을 확인하고 모양마저 예쁘게 하고 싶어 정성을 쏟게 된다. 여유롭게 요리를 하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앞으로 20년은 주기적으로 아기를 위해 밥을 지을 텐데 이 시간을 좀 더 값지게 보낼 수 없을까 하고 말이다. 당근을 썰고 양배추를 찌고 불고기를 볶고 된장국을 끓이며 나는 아기의 건강과 기분과 교육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되돌아보았다. 아기가 건강하게 크기를 온 마음 다해 기도하며 요리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시간은 온전히 아기에 대해 집중하여 생각할 수 있는 참으로 특별하고도 감사한 시간이 되었다. 요리 시간이 '일'이 되지 않기를, '의무'에서 그치지 않기를, 아기의 건강함의 탄탄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며 덧붙여 내 요리실력도 꾸준하게 상승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요리를 마치고 나니 참 신기했다. 분명 작디작은 아기의 식판이 점점 구색을 갖춰가기 시작해 결국엔 아기를 위한 한 상이 마련되고 제법 볼만해 보였다. 우리 아기 식판은 총 5개의 자리가 있다. 찬 종류 3자리와 밥과 국 자리. 한 자리 한 자리를 채울 때마다 아기를 향한 내 사랑도 차곡차곡 쌓이고, 모든 자리를 채우고 나면 그 작은 식판이 예쁘고 푸짐한 한 상처럼 보인다. 나는 요즘 내 삶 속에서 이전엔 잘하지 못했던 것도 아기 덕분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영역들을 보며 성장해 나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싹싹 다 먹은 아기의 빈 식판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빈 식판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하루 먹을 양식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지에 대해 말이다. '일용한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라'라고 들을 때마다 이전엔 그저 욕심부리지 말고 오늘 먹을 게 있다면 감사하자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는데 요즘 이 요리과정을 지나며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매일의 양식은 매일 존재해야 한다. 오늘 내가 먹을 양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빈곤하지 않고 오늘 먹을 수 있기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먹을 수 있기에 오늘의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고, 그 생명으로 우리는 오늘 하루의 모든 일들을 힘 있게 행할 수 있기에 너무나 감사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우리 아기가 밥을 먹은 후엔 더 힘차게 뛰어놀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을 목격한다. 가끔가다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그렇게 잘 먹던 밥을 먹지 못하고, 밥을 못 먹으니 힘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을 본다. 양식이 없어서만이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우린 먹을 것이 있음에도 잘 먹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식습관이 깨지면 우리의 몸과 마음의 균형도 때때로 연이어 깨진다. 균형 잡힌 식습관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한다는 사실은 늘 변함이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식사를 맛있게 하고 건강하게 하루를 지낸다면 우리의 삶도 윤택해질 것이다. 거기에 요리사의 사랑과 정성이 더해진다면 우리의 삶은 윤택함을 넘어 사랑과 감사로 풍성해질 것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남편과 아기만을 위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 내가 차린 식판 한 상이 우리 가족의 '오늘 하루'의 힘이 되고 '건강한 일상'의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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