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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희 Oct 31. 2023

화 다스리기

며칠 전 일이었다. 나는 욱하고 화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표출해 버린 일이 있었다. 친정 엄마가 집에 오셔서 아기를 잠시 부탁하고 정말 오래간만에 외출을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정도였기에 1분 1초가 소중했다. 아기책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다녀오는 것이 외출의 목적이었다. 남편은 출근길이었기에 나를 태워준다고 했고, 나는 남편차에 탔다. 그런데 내가 알던 길이 아닌 반대 길로 가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쪽으로 가면 백화점에서 못 내린다고 말하였으나 남편은 장난스레 내 말을 듣지 않고 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다른 길로 향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다가 역시나 백화점은 보였지만 내릴 수 없어 나는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 앞에서 내려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에게 문제가 일어났다. 15분 남짓 걸어가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말은 안 했지만 우선 전날 아기를 보호하다 내가 다치는 일이 있어서 발끝이 걸을 때마다 불편하게 아팠다. 아픈 발을 이끌고 걸어갈 생각에 일차적으로 단순히 화가 올라왔고, 다음으로 백화점 오픈 시간 30분 전이었기에 나는 그 앞 카페에서 정말 오랜만에 혼자만의 외출이라 커피 한 잔 하며 잠시나마 책을 읽고 싶었는데 그 계획이 무산되어 속이 팍 상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분명히 이 길로 가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사뿐히 내 말을 믿지 않은 남편이 얄미웠기에 화가 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차문을 쾅 닫고 내 이름을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에 나도 사뿐히 무시하고 절뚝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버렸다.


마음이 더 상했는지 발이 아프건 말건 나는 걷기 시작하며 화 식히기 모드에 돌입했다. 내가 좀 변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 화를 잘 안내는 성격이다.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대부분 생명을 해치지 않는 범위라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반응했었다. 그런데 이번 같은 반응은 나 자신이 좀 성숙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상했던 것 같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와, '우울'이 지나간 자리가 생각보다 짙은데?'라는 마음이 들었다. 내 삶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었고 그 모든 일들은 지나갔지만 그리고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지만 생활 속 군데군데에 그 고통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어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이 사진처럼 장면으로 찍혀있는 느낌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시작한 좋은 아침을 이대로 망쳐버리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우선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남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키우지 않아야 했고 남편의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거란 생각에 먼저는 미안했다. 남편이어서 당연한 게 아니라 어쨌든 나를 태워주고 간 것인데 내가 여기다 안 내려주고 저기다 내려줬다고 화를 내는 건 정말 잘못된 태도였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나를 마주했다. 길가에 있던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기가 뛰어다니기 시작해 늘 긴장상태로 있는 요즘, 아기가 위험할 때 종종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내가 떠올랐다. 아기가 자기주장이 생기면서 요즘 길고 진하게 울 때가 많다. 자기 생각이 생기고 의지가 생기는데 말을 못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마음에 헤아리려 노력하면서도 가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소리치며 울을 땐 순간적으로 화가 올라온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화'를 삼키기만 하는 것이 아닌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화'는 다스려져야 하는 게 아니라 덮여야 한다는 것이다.


'화'를 어떻게 덮을 수 있나? 그건 그냥 삼키는 게 아닐까? 아니다. '화'는 덮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화나 죽겠는데 덮으라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으로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다. 아기를 대상으로 생각해 보니 화를 덮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화는 사랑으로 덮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기가 힘들게 태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는 퇴원하는 날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깜깜한 암흑을 경험한 것이니 아기를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안아주라고 말이다. 그 말이 생각났다. 아기가 심하게 울을 때, 나는 그것이 힘들어 순간적으로 '화'가 올라오지만, 이 아기는 분명 답답하고 힘들어서 나의 사랑이 더 필요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나의 감정은 아기의 필요에 비하면 충분히 덮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기를 바라보니, 내 화는 그대로 덮였다. 정말 사르르 덮여 아기를 안아주어도 아기가 아프지 않을 만큼 따뜻한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황이 어찌 되었건 옹졸한 내 마음이 나에게 선의를 베푼 남편에게 '화'를 부었다. 한번 화낸 화는 주워 담을 수 없이 상황을 깨고 사람을 깨고 우리의 마음을 부수었다. '화'는 늘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마음을 다치게 한다. 그러기에 이미 엎질러진 화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꺼야 하고, 남은 잔재들은 '화'가 있기 전 원래 있어야 했던 '사랑'만이 다 책임질 수 있기에 더 사랑해야만 한다. 이전의 내 모습 중, 내가 유일하게 화를 냈던 상황들은 다 공통점이 있었다. 공의롭지 못한 상황에 나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욱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깨달은 건 어떠한 경우도 화를 내거나 화를 삼키기보다 혹은 화를 다스리려 노력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상황들을 먼저는 이성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하며 '화'가 주체가 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랑'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적어도 '내 하루'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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