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호박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by 지은담


못생긴 호박은 없습니다 - 야요이 쿠사마 "호박"

한때는 내가 제법 착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뭘 몰라 어리숙했던걸, 주변에서 "착하다, 착하다" 하니 그런가 보다 했지요.

하지만 그 말이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원치 않은 일을 떠맡게 되는, 일종의 주술 같았으니까요.


겉으론 순해 보였지만, 속은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불만을 드러낼 용기는 없고, 현실은 숨 막히기만 하니

조용히 웅크린 채 세상과 벽을 쌓고 살아갔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변화하는 세상과 점점 멀어졌고,

어느새 나는 내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아닌,

존재감 없는 보조출연자처럼 서 있었습니다.


쉰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보니,

조금씩 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단점이 하나만 드러나도 얼굴이 붉어지고 밤잠을 설쳤지만,

이것도 자꾸 반복되다 보니 이젠 조금 덤덤해졌습니다.

이런 뻔뻔함은 나이가 주는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나를 마주하는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몇 해 전, 카페와 레스토랑을 동시에 오픈했습니다.

오픈한 지 반년 만에 코로나 사태가 터졌고요.

공교롭게도 인근 연수원에 중국 교민들이 격리되면서

카페는 언론의 임시 본부가 되었고,

주변 도로는 경찰버스로 통제되었습니다.

손님은 뚝 끊기고, 동네에선 연일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날의 연속이었지요.


그 무렵, 카페 가족 한 명이 평소와는 다르게

날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아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갔습니다.

‘내일은 꼭 한마디 해야겠다’ 다짐하며 잠들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말이 울렸습니다.

‘오늘 이 건물에서 누가 제일 많이 불평했지? 누가 제일 많이 남 탓했나?’

바로 내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


미움은 관계 속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였습니다.

알아차리고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라는 내면의 외침이었지요.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 안에 미움이 커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고,

그 미움이 사라지자,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졌습니다.


그날 밤, 오랜만에 꿀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며칠째 날을 세우던 카페 가족이

어쩐 일인지 밝은 얼굴로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건넸습니다.

"요 며칠 내가 좀 심했지?"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홀 안의 공기까지 달라진 듯했습니다.


‘모든 어려움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

그 뜻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그 후로,

내 안에 굳어 있던 못생긴 사고방식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호텔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각자 전시를 감상하고,

로비에 전시된 호박 조형물 앞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지요.


그때 한 지인이 말했습니다.

"그 못생긴 호박?"

그 말이 뭐라고 또 가슴에 걸려버렸습니다.

‘엥? 내 눈엔 참 예쁘고 보석 같아 보이는데...’


순간, 떠오른 익숙한 말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이 호박 같은 게... “

줄곧 나도 그런 눈으로 세상을 봐왔던 건 아닐까?

‘호박은 못생긴 것’,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

‘어제 그랬으니 오늘도 그럴 거야.’

나는 늘 그런 단정부터 했고,

세상은 언제나,

내 생각 그대로를 반영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내 눈에 보인 타인의 허물은,

내 안의 그림자였습니다.

마주하기 두려웠던 나를,

타인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겁니다.

‘‘몰라서 미운 사람은 있어도, 알고 나면 미운 사람은 없다’는 말,

딱 맞는 말입니다.


이제 내 눈에 비친 호박은 예쁘기만 합니다.

통통한 몸매는 정겹고,

노오란 빛깔은 햇살처럼 따뜻합니다.

단단한 껍질 속에 건강의 비결을 품었으니,

기특하기까지 합니다.


못생긴 호박은 없습니다.

그 예쁨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내가 있을 뿐이죠.

내 눈을 가린 건,

어두운 세상이 아니라

내 안의 짙은 그림자 때문이었습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아요

그저 호박만 보아요.


오늘 하루,

무의미한 만남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무엇 하나 할 기운도 남지 않았습니다.

텅 비어진 채 돌아온 나는 의미 있는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또,

내게 엉겨 붙은 시든 호박잎 하나를 찾았습니다.

하나를 떼어내자

노란 호박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조금씩,

나도 예쁜 호박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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