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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Feb 05. 2023

자연건조의 때

St. Louis, MO

오래전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자면 두피에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머리를 꼭 완벽히 말리고 침대에 눕는다.

가 아니라 그 이후로 나는 덜 말린 머리를 찜찜한 마음과 함께 침대에 뉘인다.


대학교 시절 딱 한 번, 그것도 언니가 집에서 셀프로 잘라준 단발을 빼고는 늘 긴 머리를 고수해 왔다. 긴 머리를 완벽히 말리기 위해서는 못해도 15분은 족히 드라이기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나는 자연건조가 좋다. (이것도 어디서 드라이기 사용보다는 자연건조가 좋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인 것 같기도 한데… 시작은 기억이 안 난다) 아무런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데 가만히 몇 시간에 걸쳐서 말리는 자연건조 말고,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의 바람이 말려주는 자연건조. 너무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선선한 바람에 머리를 내어주는 기분이란.


하지만 이런 바람은 만나기 쉽지 않다. 일단 머리를 말리려고 밖에서 바람을 느낄 여유가 없을 때가 더 많다는 점이 그렇고 - 보통 자기 전이나 나가야 하기 전에 씻기 때문에 -, 가을이 없는 캘리포니아에 산다는 점이 그렇다.


여름은 참 뜨겁고 겨울을 참 시린 미국 동부에는 뚜렷한 가을이 존재하는데, 이곳의 가을바람이 꼭 그렇다. 길지 않은 찰나의 계절인 가을. 그래서일까, 9월 말부터 한 달가량은 평소 별로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 그렇다고 싫어한다는 뜻은 아닌 - 동부의 도시들이 반갑다. 이번 주는 Missouri에 위치한 St. Louis에서 가을바람이 머리를 말려준다. 일부러 아직 축축한 머리를 하고 커피를 사러 밖에 나갔다 온다. 서늘한 가을바람에도 따뜻한 햇볕 덕분에 춥지 않다. 호텔 바로 앞 카페대신, 십오 분가량 걸어야 나오는 카페로 향한다. 볕이 잘 드는 구석자리 앉아 들고 온 책을 펼친다. 책 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기분이 좋다. 고소한 라떼 한 잔과 창가자리 광합성 효과다. 미국에만 지점이 만 삼천 개가 넘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별다방에서 오늘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 동부에서 살아보고 싶어!‘



자연건조가 여의치 않은 집에서는 선풍기를 애용한다. 타올로 물기를 툭툭 털고 선풍기를 등지고 앉아 삼십 분가량 머리를 말린다. 가만히 멍 때리기도, 핸드폰이나 책을 보기도 한다. 너무 피곤할 때는, 침대 아래쪽에 머리를 두고 누워 머리가 절반만 침대에 걸쳐지게 한 뒤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바람을 쐬기도 한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잠이 솔솔 온다. 바로 하루 전 다녀온 도시의 날씨도, 그곳에서 다짐한 ‘동부에서 살아보기’ 계획도, 벌써 먼 옛날 꿈처럼 희미하다.

단발머리를 해보고 싶은데, 후회할 것 같아 못하고 있다. 눈을 감으니 마음에 솨- 하고 선들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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