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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Feb 22. 2023

눈에 담자, 눈에

Salt Lake City, UT

가끔씩 승무원 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스케줄은 어떤지, 진상 손님은 많은지, 가방은 어떻게 싸는지 등, 나도 승무원 일을 하기 전에는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해 물어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몰랐다며 놀라는 게 있는데, 바로 하루에 비행을 여러 개씩 해야 하는 국내선 스케줄을 이야기할 때다.


나 또한 미국 항공사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입사했기에, 초초초주니어인 내가 받게 될 스케줄을 듣고는 꽤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국제선 비행을 못 받는 건 둘째 치고, 하루에 비행을 세 개, 네 개씩 해야 한 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비행하는걸 leg로 칭하는데, 쓰리레그(three-leg), 포레그(four-leg)가 내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파리에서 크로와상을 먹고 후쿠오카에 가서 온천을 즐기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첫 스케줄을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유럽과 아시아대신 동, 서부를 오가며 대륙횡단을 하겠구나.


나는 시애틀을 시작으로 미니아폴리스, 엘에이를 거쳐 최근 미니아폴리스로 다시 베이스를 옮겼다. 이곳에서 인천비행을 안정적으로 받기 전까진 우리끼리 농담 삼아 말하는 ‘국내선 뺑뺑이’를 참 열심히도 했다. (미국 항공사 스케줄 시스템은 타국 항공사에 비해 꽤나 복잡한데,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이 '연차'기준이다. 근속연수가 높은 순서대로 좋은 비행, 본인이 원하는 비행을 스케줄에 받아 간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사실 오늘 적고 싶었던 글은 하루에 비행을 세 개씩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몸이 고단한 날들이 반복된다고 생각했지만, 약 4년간의 '국내선 뺑뺑이'는 내가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여행 중독자'들의 마음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그들이 여행에 중독되는 이유 중 (내 생각에) 가장 강력한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경유지로 가장 많이 들렀던 공항을 꼽자면, 유타주에 있는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다. 콜로라도, 와이오밍, 네바다, 아이다호, 애리조나 등에 둘러싸여 있는 주라는 점과 우리 항공사에서 두 번째 허브공항으로 밀고 있다는 점에서 서부에서는 이보다 나은 경우지가 없는 게 그 비결이 아닐까 싶다. 솔트레이크시티는 록키산맥이 지나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말은 즉, 이륙 후 안정권에 접어들기 전까지 그리고 착륙 전 10,000피트를 지나 땅에 닫기 전까지 기체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가끔 날씨까지 좋지 않을 땐 '승객 앞에서 승무원이 토를 한다면?'이라는 상상회로가 저절로 돌아간다.


이날도 평소와 같이 멀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흐린 눈으로 캐빈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약 한 시간 후면 착륙을 할 터였다. 비행기가 하강을 시작하는 Initial Descent까지 15분가량 남은 시간이다. 조종실에서 캡틴이 기내방송을 시작했다. 벌써 하강을 시작하나? 싶어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앞 뒤 설명 없이 창문을 내다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처음 타본 아이 목소리처럼, 캡틴의 신난 목소리가 계속됐다.

"모두 오른쪽 창문을 보세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뷰가 보일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마디 덧붙인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속이 메슥거리는 그 와중에도 캡틴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느껴져서일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와, 진짜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매일 보는 하늘인데 오늘, 지금, 여기, 이 하늘은 유독 정말 이쁘다. 눈에 담기는 만큼 사진으로도 담고 싶었다. 수십 장을 찍었지만 역시 오늘도 결론은 이렇게 난다. '눈에 많이 담자, 눈에'

동부에서 새벽 비행으로 시작하는 하루는 참 길다. 서부 시차가 몸에 익은 내게 동부 새벽 5시 비행은 새벽 2시 비행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렇게 새까만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시작한 하루는, 태양이 지평선과 만나는 순간부터 하늘이 점차 불타오르는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눈에 담을 수 있는 하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하루를 그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는 하루이기도 하다. 아, 이게 뭐라고 괜히 가슴이 웅장해진다. 새해 첫날 사람들이 왜 해돋이를 보러 가는지 알 것도 같다.


일출로 빨갛게 물든 하늘도,

분홍빛과 보랏빛을 지나

다시 깜깜해지는 일몰의 하늘도,

팝콘이 한가득 떠다니는 것 같은 팝콘 구름도,

설산등반을 버킷리스트에 넣게 되는 록키산맥도

다 사진에 안 담기니 눈에 담자, 눈에.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

창조주가 만들어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경관들, 그리고 그 경치를 바라보며 웅장해지는 가슴. 이 웅장해지는 가슴에 과거에 대한 회상과 후회, 약간의 추억팔이,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다시 약간의 칭찬과 질책, 그리고 미래를 향한 크고 작은 계획이 가득 들어찬다.

이거다 이거, 이 웅장해지는 가슴 때문에 다들 여행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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