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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23. 2019

주어 없는 문장은 비문

같은 종류의 구가 접속되지 않아 비문이 되고 만 민법 제77조 제2항을 보았다. 무슨 뜻인지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문법은 여지없이 어그러졌다. 전형적인 비문이다. 이처럼 접속을 제대로 하지 못해 생긴 비문도 있지만 다음은 문장에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주어가 없는 비문이다. 민법 제70조 제2항을 보자.


제70조(임시총회) ①사단법인의 이사는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임시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 회의의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 때에는 이사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야 한다. 이 정수는 정관으로 증감할 수 있다.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 회의의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 때에는 이사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야 한다."에서 '제시하여'와 '청구한'은 주어가 없다. 누가 제시하고 누가 청구한 것인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이 청구하고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에는 주격조사 ''가 아닌, 부사격조사 '으로부터'가 붙어 있다. 부사격조사가 붙은 이상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는 주어가 아니다. 주어일 수 없다. '제시하여'와 '청구한'의 주어가 없기도 하지만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와 호응할 말도 없다.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와 '회의의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은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요컨대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 회의의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 때에는 이사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야 한다."는 비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비문에서 벗어나는가. 간단하다.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으로부터'를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라고 하면 된다. '회의의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의 주어가 갖추어지면서 문장이 문법적으로 완전해진다. 


제70조(임시총회) 

총사원의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사항을 제시하여 청구한 때에는 이사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야 한다.




주어가 필요함에도 주어를 두지 않아 비문이 된 예(민법 제70조 제1항)를 보았다. '5분의 1 이상'라고 하면 될 것을 '5분의 1 이상으로부터'라고 함으로써 생긴 비문이었다. 다음 민법 제31조 문장도 문법성이 의심스럽다.  


제31조(법인성립의 준칙)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이라고 했다. 위 문장은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면 성립하지 못한다.'라고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 성립하지 못한다.'라고 해서 생경한 느낌을 준다.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한다'는 자연스러운 문장이지만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다'는 도무지 해석이 잘 안 되는, 괴이한 문장이다.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한다'가 자연스러운 문장이므로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는다'도 자연스러운 문장이요 따라서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으면'도 자연스럽다. 이에 반해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다'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도 자연스럽지 않다. 요컨대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이라고 써야 할 까닭이 없다. 다음과 같이 쓸 때 쉽게 이해된다.


제31조(법인성립의 준칙) 법인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면 성립하지 못한다.


이렇듯 어색하고 불필요한 '~함이 아니면'을 쓴 예는 민법 제337조 제1항과 제349조 제1항에도 나타난다. 각각 '채무자가 이를 승낙함이 아니면', '제삼채무자가 이를 승낙함이 아니면'이라고 했는데 '채무자가 이를 승낙하지 아니하면', '제삼채무자가 이를 승낙하지 아니하면'이라고 썼더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어색한 표현을 써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되고 말았다.


제337조(전질의 대항요건) 

①전조의 경우에 질권자가 채무자에게 전질의 사실을 통지하거나 채무자가 이를 승낙함이 아니면 전질로써 채무자, 보증인, 질권설정자 및 그 승계인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전조의 경우에 질권자가 채무자에게 전질의 사실을 통지하거나 채무자가 이를 승낙하지 아니하면 전질로써 채무자, 보증인, 질권설정자 및 그 승계인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제349조(지명채권에 대한 질권의 대항요건) 

①지명채권을 목적으로 한 질권의 설정은 설정자가 제450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삼채무자에게 질권설정의 사실을 통지하거나 제삼채무자가 이를 승낙함이 아니면 이로써 제삼채무자 기타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지명채권을 목적으로 한 질권의 설정은 설정자가 제450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삼채무자에게 질권설정의 사실을 통지하거나 제삼채무자가 이를 승낙하지 아니하면 이로써 제삼채무자 기타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민법은 법률 전문가가 아니면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부분이 많다. 게다가 문장 자체가 한국어답지 않고 생경한 느낌을 주어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내용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문장만큼은 문법에 맞게 써야 한다.




민법 제478조도 주어가 없어서 비문인 사례이다.


제478조(부족변제의 충당)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에 변제자가 그 채무전부를 소멸하게 하지 못한 급여를 한 때에는 전2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에'가 무슨 뜻인지 모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떤 채무를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어 변제하게 된 경우라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는 어떤가. 동사 '요할'의 주어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수개의 급여를 요하는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요할'은 주어가 없어도 되는가. 주어가 없어도 되는 동사는 없다. 1개의 채무가 수개의 급여를 요하는 것으로 이해는 되지만 '1개의 채무가'가 아니라 '1개의 채무'라고 표현되어 있다. '1개의 채무'라고 하든지 아니면 '1개의 채무에'를 유지하려면 그 뒤를 고쳐서 '수개의 급여가 필요할 경우에'와 같이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주어가 갖추어지면서 문법적으로 반듯해진다. 무슨 뜻인지 이해된다고 해서 비문법적인 문장이 용인될 수는 없다. 


제478조(부족변제의 충당) 1개의 채무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에 변제자가 그 채무전부를 소멸하게 하지 못한 급여를 한 때에는 전2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제478조(부족변제의 충당)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가 필요할 경우에 변제자가 그 채무전부를 소멸하게 하지 못한 급여를 한 때에는 전2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민법 제572조 제2항도 주어가 없어 무슨 뜻인지 금세 파악이 잘 안 된다.


제572조(권리의 일부가 타인에게 속한 경우와 매도인의 담보책임) 

①매매의 목적이 된 권리의 일부가 타인에게 속함으로 인하여 매도인이 그 권리를 취득하여 매수인에게 이전할 수 없는 때에는 매수인은 그 부분의 비율로 대금의 감액을 청구할 수 있다.

②전항의 경우에 잔존한 부분만이면 매수인이 이를 매수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선의의 매수인은 계약전부를 해제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잔존한 부분만이면 매수인이 이를 매수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이라고 하였는데 '잔존한 부분만이면'은 무엇이 잔존한 부분만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법률 전문가들은 문맥으로 미루어 무엇이 잔존한 부분만인지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법조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암호처럼 아는 사람만 알 수 있게 씌어서는 안 된다. '잔존한 부분만이면'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주어 없는 표현을 쓸 것이 아니라 '잔존한 부분만 매도인의 권리에 속함을 알았다면' 또는 '매매 목적물의 일부가 타인의 권리에 속함을 알았다면'이라고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원문을 최대한 살리고자 할 경우에도 '매도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 잔존한 부분만이면'처럼 주어를 보충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를 함부로 생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②전항의 경우에  잔존한 부분만 매도인의 권리에 속함을 알았다면 매수인이 이를 매수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선의의 매수인은 계약전부를 해제할 수 있다.


②전항의 경우에 매매 목적물의 일부가 타인의 권리에 속함을 알았다면 매수인이 이를 매수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선의의 매수인은 계약전부를 해제할 수 있다.


②전항의 경우에 매도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 잔존한 부분만이면 매수인이 이를 매수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선의의 매수인은 계약전부를 해제할 수 있다.




주어 없이 쓸 수 있는 동사는 없다. 동사는 반드시 주어를 필요로 한다. 즉 어떤 문장에서든 주어가 있어야 한다. 다만 문맥으로 미루어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할 때 생략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주어는 생략할 수 있지만 생략된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할 때에 한한다. 그런데 법조문에서 주어 생략은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생략된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하다고 보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만인이 이용하는 법조문이라면 될 수 있으면 필요한 성분을 생략하지 않고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낫다. 


아래 민법 제8조 제1항에서 주어는 생략되어 있다.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의 주어가 없다. 누가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는 것인지 드러나 있지 않다. 물론 '미성년자는'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생략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인가. 법조문은 법률가들만 본다고 생각해서일까. 일반인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문장성분을 갖추어서 쓰는 것이 낫다. '미성년자는'을 주어로 채워 넣을 필요가 있다.


제8조(영업의 허락)

①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허락을 얻은 특정한 영업에 관하여는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허락을 얻은 특정한 영업에 관하여는 미성년자는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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