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오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말이 있다. 인명재천이란 말도 종종 듣는다. 그렇기는 하나 어제 들은 부음은 실로 놀라웠다. 열흘 전 만났던 친구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자못 망연했다.
친구와의 인연은 43년이나 됐다. 1979년 같은 대학 같은 계열에 입학해서 만났다. 2학년 때 그는 철학과를 선택했고 나는 언어학과였다. 학문의 길을 택해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도교수와 마찰을 빚었고 끝내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당시 석사를 받으면 6개월만 훈련 받고 소위로 전역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그는 그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늦깎이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나서 학문을 포기하고 고시 공부를 시작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1994년이었다. 고향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고 나중에는 서울로 와서 서초동 법원 앞에서 변호사 업무를 했다. 그러나 변호사 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재산을 정리해서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내는 대학원 공부를 했고 세 딸들도 학교를 다녔다.
6~7년쯤 전 그는 미국에서 혼자 돌아와 인제군 기린면 내린천 부근 암자에서 몇 달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고 2020년 11월께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만났다. 그해 여름에 코로나에 걸려서 꽤 고생했다면서도 무척 활기찬 모습을 보였던 그다. 한두 달 머물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2022년 봄 다시 한국에 왔다. 당뇨 합병증이 심해져서 치료를 위해 한국에 온 모양이었는데 금방 내게 연락하지 않았고 초가을이 돼서야 연락해 왔다. 9월말이나 10월초였을 것이다.
그와 약 2년만에 낙성대역 부근에서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2년 사이에 부쩍 늙었고 걸음걸이가 좀 불편해 보였다. 보라매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도 했다. 콩팥이 망가졌고 폐에 물이 차 호흡도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하루 4km 정도 걷는 등 재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차차 좋아지겠지 하는 믿음을 가졌다. 그 후로 카톡을 몇 차례 했다. 그가 분당 율동공원 부근 음식점이 좋은 데가 많으니 한번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날짜를 연기한 끝에 드디어 11월 26일에 만나기로 했다.
선릉역 부근 지하의 시래기국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그는 몰라볼 정도로 노인이 돼 있었다. 깜짝 놀랐다. 그러나 대화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정신이 맑아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근처 스타벅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철학 이야기, 종교 이야기, 유럽여행 같이 가잔 이야기 등등을 하다가 함께 강남교보문고에 가자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보에 가서 그는 참 오래도록 책을 골랐다. 철학의 니체 코너에 가서 여러 권을 고르는 등 그는 한보따리 책을 사들고 교보를 나왔다. 이미 시간은 저녁 때였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점심을 먹었던 그 식당으로 다시 가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서 저녁까지 먹고 나서 같이 2호선을 타고 그가 먼저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렸다. 교보에서 산 책을 한 아름 싸들고...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일 줄은 까맣게 몰랐다. 12월 8일 카톡으로 대학 동창 K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친구의 죽음을 알리는 기별이었다. 그러니까 11월 26일 강남에서 만나 7시간을 같이 보내고 난 후 열흘도 안 돼 세상을 떠난 것이다. 건강이 급격히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원룸에서 독거하던 그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지만 친구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뜰 줄은 참으로 몰랐다. 본인 자신도 몰랐겠지만 친구인 나도 몰랐다. 알았다면 이렇게 허망하게 그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이든 같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이 없이 나눴을 것이다. 열흘여 전 7시간 동안 이야기 나눴듯이... 나는 그처럼 '사람 좋은'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나이 들어서도 그처럼 학구열이 넘치고 지적 호기심이 반짝이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가 내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실행하지 못했다.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