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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이 놀라운 독일인 신부가 아니었다면...

by 김세중

조선일보가 겸재 정선의 화첩을 독일에서 반환받아 온 성베네딕도회 선지훈 신부에 대해 인터뷰 기사를 크게 실었다. 아! 선지훈 신부 덕분에 겸재 정선의 작품 화첩이 80년 동안이나 독일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구나! 기사를 읽으며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이 기사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신부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에 왔다. 특히 1925년에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의 모습을 촬영해 영화로 만들었다. 촬영 기기를 갖고 왔고 기사를 대동했단다. 당시 기술의 한계로 무성영화이고 당연히 흑백영화다. 하지만 화질이 상당히 깨끗하다.


KBS가 베버 신부가 남긴 필름을 편집해 2010년에 방송한 1시간짜리 프로를 보면서 영상에 푹 빠졌다. 베버 신부는 한국을 서양인들에게 실감나게 알리기 위해 한국과 이탈리아 지도를 비교해서 직접 그려 보이면서 원산(元山), 조선(朝鮮)을 한자로 써보였다. 한자는 서양인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문자인가. 그걸 배웠다는 것 자체가 범상하지 않다.



베버 신부는 참으로 꼼꼼하게 한국인들의 사는 모습을 영화에 담았다. 마을사람들이 몇 날 며칠 옹기 굽는 모습을 담았고, 사람들이 짚신을 만들어 신는 모습, 옷감을 짜는 과정, 장례 풍습 등을 세밀하게 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아는지 일본사람들이 만들어 신는 나막신과 한국사람들이 신는 짚신도 비교하며 한국인들의 지혜와 손재주에 대해 감탄했다.


베버 신부는 1925년 한국을 방문하고 그때 찍은 영상을 1927년에 영화로 만들었다. 그게 뮌헨 부근 상트오틸리엔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 아마 디지털로 복원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귀중한 영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영상으로 약 100년 전 한국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영상을 보면 베버 신부가 한국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베버 신부는 1931년 탄자니아로 가서 1956년 거기서 선종했다. 생애의 마지막 25년을 탄자니아에서 보낸 것이다. 그는 왜 탄자니아로 갔을까. 1925년 이후 한국에 다시 온 적은 없을까. 궁금함을 풀 길이 없다.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도대체 1925년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어떻게 해서 겸재 정선의 화첩을 입수하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지만 기사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저 베버 신부가 겸재의 화첩을 '수집했다'고만 하고 있다. 베버 신부는 겸재의 화첩을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샀을까. 아니면 선물을 받았을까. 알 길이 없다. 하긴 조선일보 기자도 거의 100년 전 일을 알 수가 없었으니 기사에서 쓰지 못했을 것이다. 2005년 독일 상트오틸리엔수도원에서 겸재의 화첩을 반환받아 온 선지훈 신부라고 1925년 당시 사정을 알까.


1925년 겸재의 화첩이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화첩은 누가 갖고 있었을까. 겸재의 후손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궁금하기 그지없지만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증언해줄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는데 겸재의 화첩을 갖고 있던 누군가가 베버 신부가 너무나 고마워서 감사의 표시로 선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지금 겸재의 화첩은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있는 모양이다. 공개되고 있다면 언제 왜관에 가서 보고 싶다. 비록 화첩이 한국에 돌아왔지만 '영구 임대' 형식이라 소유권은 상트오틸리엔수도원에 있단다. 외국 소유기 때문에 국보나 보물로 지정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니 안타깝다. 겸재 화첩 말고도 이런 저런 경로로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문화재가 많을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20만 점이 넘는다니 어마어마하다. 나라가 허약하고 혼란스러울 때 외국으로 빠져 나간 것들이다. 하나씩 차차 돌아오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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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화첩 중의 '금강내산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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