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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n 29. 2023

권리를 '보류'한 때에는?

보유(保有)나 보지(保持)라야

임대차에 대해 규정한 민법 제636조에는 '해지할 권리를 보류한 때에는'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금세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일반인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법조인들도 이 표현을 금세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권리를 보류하다니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권리를 보류한'은 무슨 뜻일까? 리를 갖지 않고 미룬다는 것일까, 그 반대로 권리를 가진다는 뜻일까?


제636조(기간의 약정있는 임대차의 해지통고)

임대차기간의 약정이 있는 경우에도 당사자일방 또는 쌍방이 그 기간내에 해지할 권리를 보류 때에는 전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이에 대한 답은 다소 엉뚱하게 일본 민법과 비교해 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민법 제618조는 다음과 같다.


第六百十八条

当事者が賃貸借の期間を定めた場合であっても、その一方又は双方がその期間内に解約をする権利を留保したときは、前条の規定を準用する。


이 조문을 deepl에 넣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제618조

당사자가 임대차 기간을 정한 경우에도 당사자 일방 또는 쌍방이 그 기간 내에 해약할 권리를 유보한 경우에는 전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보라. 우리 민법 제636조와 일본 민법 제618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지 않은가.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내용이 실은 똑같다. 일본 민법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한국 민법 제636조에서는 '권리를 보류한'이라 했는데 일본 민법 제618조는 '權利를 留保한'(번역)이라고 했다. 일본어 그대로 하지 않고 留保보류(保留)로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留保보류(保留)로 바꾼 것은 잘한 일이었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留保보류(保留)로 바꾼 것은 잘못이었다. 일본어의 留保는 한국어의 보류도 아니었고 유보도 아니었다. 일본어 留保는 일본어 사전에 다음과 같이 뜻풀이되어 있다.


2 法律で、権利や義務を残留・保持すること。


일본어의 留保류(殘留).보지(保持)다. 남겨서 가지고 있다는 뜻이 일본어 留保다. 이에 반해 한국어의 유보(留保)보류(保留)는 둘 다 똑같이 '어떤 일을 당장 처리하지 아니하고 나중으로 미루어 두다'라는 뜻이다. 남겨서 가지고 있다는 뜻이 없다. 이렇게 가끔 일본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는 한자가 같아도 뜻이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번역을 잘해야 한다. 한자가 같다고 해서 그대로 음만 한국어로 옮기면 엉뚱한 뜻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민법 제636조의 '보류'는 일본어 留保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유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는가? 보지(保持)라고 하는 것이 맞겠으나 보지(保持)는 국어사전에만 올라 있을 뿐 잘 쓰지 않고 낯선 말이어서 보지(保持)를 피한다면 '보유(保有)한'이라고 하거나 아예 한자어를 쓰지 않고 '가진'이라고 했어야 했다.


재미있는 일이 있다. 법무부가 2014년에 법률 전문가들로 민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 민법을 완전히 새로 쓴 개정안을 만들어 2015년 제19대 국회에 제출했고 그때 처리가 안 되어 2018년 제20대 국회에 또 제출했다. 그 개정안에는 민법 제636조의 '보류한'이 '유보한'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 민법의 留保를 그대로 쓴 것인데 여전히 틀렸다. 일본어 留保의 의미와 한국어 유보(留保)의 의미가 다름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것인데 그나마 국회에서 통과가 되지 않아 없던 일이 됐고 지금도 민법 제636조는 '권리를 보류한'이다. '권리를 보유한'이거나 '권리를 가진'이어야 한다. 그렇게 바꿀 때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법을 다루는 사람들도 이 조문을 읽으며 어리둥절해하지 않는다. 단박에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법이 아무리 보수적이라 해도 틀린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걸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로스쿨 학생들은 민법이란 과목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데 그 어려움 중 상당 부분이 민법 조문 곳곳에 들어 있는 이런 잘못된 문장 때문임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로스쿨 학생들도 모르고 교수들도 모른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젊은이들을 어려움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나. 그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그리고 법은 일반 국민도 읽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권리를 보류한 때에는'을 이해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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