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Jul 01. 2023

광복 직후의 모습

판검사도 한글을 배웠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자료대한민국사>를 읽다가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검사들에 대해 한글 강습 실시'라는 제목이었다. 판사와 검사들이 한글을 배우다니! 요즘 관념으론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던 모양이다. 35년간의 일제 통치 아래서 행정, 사법은 일본어로 행해졌다. 국어는 일본어였다. 일제 말기에는 아예 조선어 말살 정책까지 시행됐으니 우리말은 죽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일제강점기에 판사의 판결문, 검사의 공소장은 일본어로 쓰였다. 판검사들이 한글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한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고 그 때까지 이 나라를 지배해왔던 일본인들은 황급히 짐을 싸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판검사들도 물론 그랬다. 갑자기 생긴 빈 자리를 충원하느라 미군정 당국자들이 허둥지둥했단다. 그런 혼란기에 쉽게 판검사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법원 서기 정도 경력을 가진 사람이 판사가 되는 등... 어쨌거나 판검사인데 한글을 몰라 토요일에 모여서 가갸거겨를 배웠다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 아닐 수 없다.


광복 이후 미군정은 오락가락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법령을 폐지한다고 명령을 내렸다가 폐지하고 보니 대체할 법령을 갑자기 만들 수 없고 법의 공백 상태를 맞으면 안 되겠으니 일제강점기의 법령을 계속해서 쓴다고 바로 뒤집었다.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과 같은 기본 법제는 단시일에 만들 수 없는 것이어서 미군정 시절인 1947년에는 <법전기초위원회>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9월에는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해서 기본 법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53년에 형법, 1954년에 형사소송법, 1958년에 민법, 1960년에 민사소송법, 1962년에 상법이 제정되었다. 이 나라는 정부 수립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의 법을 갖게 되었다. 그 사이에는 일본 법을 썼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한글이 걸어온 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광복 직후 남한 지역의 문맹률은 12살 이상 전체 인구(10,253,138명)의 약 78%(7,980,922명)로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일제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말과 한글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당시 대다수의 국민이 한글을 알지 못하는 문맹 상태였다. 이 때문에 미 군정청은 문맹 문제를 관장할 ‘성인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문 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또한 공민학교를 설치하는 등 학령기를 초과하여 초등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아동, 청소년 및 성인들을 위한 교육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48년 문맹률은 정부 수립 시 약 41.3%로 낮아졌다.


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광복 직후에 78%였는데 1948년에 41.3%로 낮아졌다니 불과 3년만에 거의 반으로 줄어든 게 사실일까 싶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광복 직후 우리말을 되찾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이 얼마나 드높았는지 알 수 있다. 전국 곳곳에서 한글 강습이 맹렬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만하다. 미군정 당국이 문맹 퇴치를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워낙 한글이 배우기 쉬운 문자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광복 직후엔 판사, 검사도 한글을 배워야 했지만 지금은 문맹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고령층에선 좀 있겠지만 젊은이들이 한글을 모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한국문화를 동경하여 한글을 배우고 있다. 새삼 소리글자요 음소문자인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그들에 꿀리지 않고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쉬운 문자의 덕이 아닌가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미란의 나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