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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n 06. 2024

얼마나 익어버렸으면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2024년 6월 5일 오후 제22대 국회 첫 본회의가 열려서 국회의장을 투표로 선출했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이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선출이 끝나고 우원식 의장이 단상에 올라 인사를 했다. 연설이 시작됐다. 나는 한마디 한마디를 귀 기울이며 들었다. 


그런데 도중에 필자의 귀가 번쩍 뜨이는 구절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연설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연설에 사용된 언어 표현이 내 귀를 자극했다. 국회의장은 "국회가 의결한 법률이 헌법에 위반하거나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제약하는 등의 사유가 아니라면..." 하고 말했다. 국회의 입법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은 함부로 행사되어서는 안 됨을 역설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헌법에 위반하거나'라고 했다.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위반하다'는 직접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 아닌가. 그리고 그 직접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붙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국어문법 아닌가. 우리가 '법을 위반한다'고 하지 '법에 위반한다'고 하나. 우리가 '규칙을 위반한다'고 하지 '규칙에 위반한다'고 하나. 그런데 왜 의장은 '헌법에 위반하거나'라고 하나. '헌법을 위반하거나'라고 해야 하지 않나.


연설문은 아마도 보좌진이 작성했을 것이다. 그것을 우원식 의원이 사전에 읽어 보았을 것이다. 보좌진이 '헌법 위반하거나'라 썼을 것이고 그것을 읽어본 우 의원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일이 빚어졌을까. 그것은 우리나라 기본법에 있다. 민법은 헌법을 제외한 모든 법의 기본이다. 그 민법에 '~을/를 위반하다'가 아닌 '~에 위반하다'가 숱하게 나온다. 다분히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틀린 표현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 나라의 수많은 법률인들이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모든 법률 조문에 '~에 위반하다'라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을/를 위반하다'가 있다. 민법과 기타 법률 몇 군데에 '~에 위반하다'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고 중요성이 높은 민법에 '~에 위반하다'가 들어 있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에 위반하다'가 몸에 밴 법률가들이 많다. 그 결과 신임 국회의장의 인사말에까지 '헌법에 위반하거나'가 등장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법조문에 잘못된 '~에 위반하다'와 바른 '~을/를 위반하다'가 뒤섞여 있다. 잘못된 '~에 위반하다'를 고치지 않고 남겨두고 있는 탓이다. 민법은 1958년에 제정되었으니 어언 66년이 지났다. 왜 바로잡지 않나? 왜 말의 질서가 어지럽혀지는데도 가만 두고 있나? 국회의장의 인사말을 들으면서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국회의사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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