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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02. 2024

황당한 법조문

잘못된 건 고쳐야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에 '완성하다', '성취하다'와 같은 타동사를 자동사로 쓰거나 '증가하다'와 같은 자동사를 타동사로 쓴 조문들은 다 비문이다. '완성하다', '성취하다'가 아니라 '완성되다', '성취되다'라 했어야 하는데 '시효가 완성한다', '조건이 성취한'과 같이 잘못 썼다. '증가하다'는 자동사이기 때문에 타동사를 쓰려면 '증가시키다'라고 하거나 '늘리다'와 같은 표현을 써야 한다. 


틀린 표현도 자꾸 쓰다 보면 익숙해져서 잘못된 줄 모르게 되기도 하는데 다음 조문은 아무리 자주 봐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바로 이상하게 느껴짐은 물론 볼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할 것 같다.


민법

제118조(대리권의 범위) 권한을 정하지 아니한 대리인은 다음 각호의 행위만을 할 수 있다.

1. 보존행위

2.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그 이용 또는 개량하는 행위


민법 제118조 제2호는 대리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열거하고 있다. 대리인은 보존행위는 당연히 할 수 있고 이용하거나 개량하는 행위도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 '변하다'는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인데 목적어인 '성질'이 있기 때문에 '성질'과 '변하지'는 충돌한다. 그래서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나. '변하지'라고 할 게 아니라 '변하게 하'라고 하거나 '화시키'라고 했어야 했다. 혹은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고 했더라도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사람이 변했다", "음식이 변했다", "모습이 변했다"라고 하지 "사람을 변했다", "음식을 변했다", "모습을 변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법 조문에 '성질을 변하지'가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오류다. 이런 말이 안 되는 법조문을 가지고 오늘도 법학자들은 민법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법관들은 재판을 하고 있다. 잘못된 건 고쳐야 한다. 그게 정의로운 태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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