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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05. 2024

문법을 위반하는 법조문

왜 문법을 위반하나

'위반'이란 말은 일상생활에서 참 많이 쓰는 말이다. '위반'을 모르는 한국사람이 있을까. 명사는 '위반'이고 동사는 '위반하다'이다. 동사 '위반하다'는 타동사이고 따라서 목적어가 있다. '위반하다'의 목적어로 흔히 쓰이는 말들이 '규정', '규칙', '법규', '법률', '법령', '법', '정관', '약속', '지시', '명령' 따위다. 그리고 이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붙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사람이 따르는 한국어 문법 규칙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우리나라 법률에는 이 규칙이 잘 지켜지고 있지 않다. 대신 엉뚱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 '~을/를 위반하다'라고 해야 하는데 법조문에는 '~위반하다'가 참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요즘 만들어지는 법률에는 '~을/를 위반하다'라고 하지만 기본법에 속하고 오래 전인 1950년대나 1960년대에 만들어진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에 이런 '~에 위반하다'가 들어 있다. 예를 보자.


민법 

제38조(법인의 설립허가의 취소) 법인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주무관청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형법

제112조(중립명령위반) 외국간의 교전에 있어서 중립에 관한 명령에 위반한 자는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상법

제176조(회사의 해산명령) ①

(전략)

3. 이사 또는 회사의 업무를 집행하는 사원이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하여 회사의 존속을 허용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때


형사소송법

제441조(비상상고이유) 검찰총장은 판결이 확정한 후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것을 발견한 때에는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할 수 있다.


어떻게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이 아니고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이라는 괴상한 표현이 법조문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그 실마리는 일본어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어에도 국어 '위반하다'와 뜻이 같은 동사 '違反する'가 있는데 이 말이 일본어에서 '~違反する'와 같이 쓰인다. 즉 일본어 동사 '違反する'는 앞에 오는 명사에 조사 ''가 붙는다.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의 '~ 위반하다'가 이 일본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서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이란 표현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걸쳐 제정된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법을 공부한 이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체로 1890년대에서 1910년대 사이에 출생한 그들에게는 일본 법과 일본어가 너무나 익숙했을 것이다. 한국어보다는 오히려 일본어가 더 친숙했을지 모른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은 한국어를 그리 잘 알고 잘 쓰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를 잘 알았다면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라고 했겠는가.


앞선 시대 사람들이 잘못 만든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 같은 표현을 60~70년이 지난 지금의 법률가들도 쓰고 있고 국민들도 그런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게 될 말인가.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이면 어떻고 '조건 위반하거나', '명령 위반한', '정관 위반하여', '법령 위반한'이면 어떤가라 할 것인가. 부끄러운 과거는 씻어내야 한다. 조사는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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