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Aug 19. 2024

낡은 법조문은 수선해야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불편하다

민법 제538조는 '채권자 귀책 사유로 인한 이행 불능'이다. 말이 거창하지만 알고 보면 단순하다.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채무를 이행하고자 하는데 채권자의 협조를 필요로 할 경우가 있다. 그런데 채권자가 그 협조를 하지 않아서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할 때에는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협조하라고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치다.


이 조 제1항에 '채권자의 책임있는 사유로', '당사자쌍방의 책임없는 사유로'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 느낌이 들지 않나. '채권자', '당사자쌍방', '책임'이란 말로부터 이 조문이 뭘 의도하는지는 대체로 파악하겠지만 표현이 매끄럽지 않음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민법

제538조(채권자귀책사유로 인한 이행불능) 

①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채권자 책임있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채권자의 수령지체 중에 당사자쌍방 책임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도 같다.


'책임이 있다', '책임이 없다'는 앞에 '~에게'가 와야 자연스럽다. 즉 '채권자에게 책임이 있는 사유로', '당사자 쌍방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라고 했더라면 한눈에 뜻이 선명하게 머리에 들어왔겠지만 '채권자 책임있는 사유로', '당사자쌍방 책임없는 사유로'라 되어 있어 알쏭달쏭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채권자의 책임있는 사유로'가 무슨 뜻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민법을 제정할 때 관보에는 다음과 같이 고시되었다. 



이 조문에서 '채권자의 책임'이란 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채권자의 책임인 사유', '채권자의 책임이 아닌 사유'라고 했어야 했다. 그렇게만 했더라도 문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런데 '채권자의 책임 있는 사유'라고 했기 때문에 도무지 문법에 맞지 않고 그래서 무슨 말인지 금방 알 수가 없다. 뭉뚱그려서 '채권자에게 책임이 있는 사유인가 보다' 하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명료, 명쾌해야 할 법조문이 어찌 이 모양인가. 


우리는 '잘못이 있다', '잘못이 없다'라는 말을 할 때 '~에게 잘못이 있다', '~에게 잘못이 없다'라고 한다. 그것처럼 '책임이 있다', '책임이 없다'라는 말을 할 때도 '~에게 책임이 있다', '~에게 책임이 없다'라 해야 한눈에 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조사를 바로 쓰지 않으니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문맥에 맞는 조사를 쓰면 문장의 뜻이 선명하게 파악되지만 조사를 잘못 쓰면 뭔가 께름칙한 것이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으면 편안하지만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옷을 입으면 불편하지 않나. 말도 다르지 않다. 낡고 틀린 법조문은 수선해야 한다. 마냥 끌어안고 있을 게 아니다. 새로운 세대에게도 이런 괴상하고 고약한 조문을 물려줘야 하나. 70년 가깝게 이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1950년대의 문장을 2020년대에도 쓰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