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갈 길이 멀다

일본어 잔재의 뿌리는 깊다

by 김세중

브런치를 시작한 지가 벌써 여러 해 된다. 5년도 넘었다. 어제 필자의 글에 한 분이 달아주신 댓글은 내게 큰 고무가 되면서 동시에 자극을 주었다. 외롭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면 먼저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내막은 이렇다.


10년은 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 대학 법대 수업에서다. 민법총칙 첫 시간에 교수님이 민법 제2조 제1항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를 설명하시면서 '신의에 좇아'의 '좇아'는 일본식 표현이니 '따라'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듣고 있던 학생은 '아니, 법조문이 그렇게 돼 있는데 학자가 맘대로 고쳐서 읽어도 되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교수님 말씀보다 법조문이 더 옳다고 믿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10여 년이 지났다. 이제야 안다. 교수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필자가 웃음이 나온 것은 "철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1학년이 뭘 알겠습니까?"라고 한 대목에서였다.


대학 신입생으로서야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설마 법조문이 잘못됐으리라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교수님 말씀이 곧이곧대로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차츰 공부를 해가면서 법조문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법조문에 잘못된 부분이 곳곳에 있다는 걸 깨달아간 것이다.


'신의에 좇아'가 일본식 표현이라고 생각한 법학자가 어찌 고 남윤삼 교수뿐이겠는가. '신의에 좇아'가 일본식 표현이니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법조인들이 많았다. 이를 증명하는 일이 있다. 2002년에 민사소송법은 전면 개정되었는데 개정되기 전까지 민사소송법 제1조는 다음과 같았다.


제1조 (신의성실의 원칙) 법원은 소송절차가 공정ㆍ신속하고 경제적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당사자와 관계인은 신의에 좇아 성실하게 이에 협력하여야 한다.


그러던 것이 2002년 민사소송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제1조 (민사소송의 이상과 신의성실의 원칙)

①법원은 소송절차가 공정하고 신속하며 경제적으로 진행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②당사자와 소송관계인은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소송을 수행하여야 한다.


'신의에 좇아'가 '신의에 따라'로 바뀌었던 것이다. '신의에 좇아'는 일본 법조문의 '信義に従い'를 생각 없이 옮긴 것이고 '좇아'를 쓴다면 '신의 좇아'라고 해야 하고 '좇아'보다는 '따라' 또는 '지켜'가 더 낫다. 그래야 우리말답다.


이렇게 민사소송법은 이미 20여 년 전에 일본어투를 벗어 던졌지만 민법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대로다. 왜 민법이라고 우리말답게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겠는가. 2015년과 2019년에 국회에 제출된 민법 개정안에는 '신의에 좇아'는 '신의를 지켜'로 반듯하게 바뀌었지만 국회는 민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았고 법안은 폐기되고 말았다. 당시 민법 개정안을 마련한 이들도 법학자들이었다. 법학계 안에서도 우리 법조문에 남아 있는 일본어투를 털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 피해자는 후학들이고 국민들이다. 국격이 말이 아니다. 최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민법 개정안에 제2조 제1항의 '신의에 좇아'는 물론이고 다른 많은 조항에서도 '~에 좇아'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일본어 잔재의 뿌리가 여간 깊지 않음을 느낀다. 갈 길이 멀고 험난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공지능에 물어보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