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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Mar 16. 2024

베트남 전쟁 이후의 이야기, 루(Ru)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슬퍼하면 진다"

베트남 전쟁을 그린 영화는 수없이 많다.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아.. 그리고 로빈 윌리엄스, '굿모닝 베트남'. 그만큼 베트남 전쟁은 참혹했고 미국에게는 뼈아픈 과거였다. 그리고 지난해,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는 특별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아름다웠다. 슬프지만 담백했고, 소녀의 눈은 맑았다. 베트남계 캐나다 작가 킴 투이의 자전적인 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 '루'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주인공과 그 가족이 겪어야 했던 전쟁 이후의 전쟁, 그들이 '보트 피플'*이 되어 말레이시아의 난민수용소를 거쳐 머나먼 캐나다 퀘벡 땅에 정착하기까지 겪은 아픔과 행복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냈다.


대부분의 베트남 전쟁영화가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고통받던 남자들에 이야기였다면, '루'는 전쟁이 끝난 후 여전히 이어지던 혹독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망망대해로 아이들을 작은 배에 실어 띄어 보내던 부모의 모습이고, 처형된 어린 아들을 발견한 어머니의 눈물, 오랜 세월 뙤약볕에서 농사를 짓느라 하늘 한 번 보기 힘들던 아낙의 굽은 등, 그리고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사창가에 서있는 소녀들이다. 아니, 여성들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전쟁으로 고통받은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주인공 안 띤은 베트남의 구정 대공세가 있던 1968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의 전쟁은 1975년 북베트남이 승리하고 사회주의 국가로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단란하던 가정은 어느새 군인들이 점거해서 긴장감을 더하던 어느 날, 아이들은 잔잔한 피아노 곡을 틀었다. 소년병들은 하나둘씩 오디오 옆으로 모여 앉았다. 이념을 떠나 배고픔과 두려움 속에 스며들던 햇볕 같은 평화로운 풍경을 어른들은 군홧발로 짓이겼다. 어쩔 수 없이 떠난 망명의 길은 험난했다. 2백 명을 위해 마련되었으나 2천 명의 난민이 지내야 했던 말레이시아의 난민수용소의 시설은 열악했고, 여정 끝에 도착한 몬트리올은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대체로 디아스포라 문학에서 드러나는 낯선 땅에서의 소외감이나 정체성의 혼란이 '루'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받아준 낯선 이들의 따뜻한 시선에서 희망을 찾았고 감사함을 담았다. 주인공 안 띤은 작가인 킴 투이의 과거이자 모든 베트남 망명자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루'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베트남의 모든 여성, 그리고 남성, 캐나다에서 이들을 맞이했던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나를 향해 몸을 숙인 선생님이 내 두 손을 잡으며 "내 이름은 마리 프랑스란다. 넌?"이라고 물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한 음절 한 음절 그대로 따라 했다. 눈을 깜빡이지도,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싱그러움과 경쾌함과 달콤한 향기가 구름처럼 나를 감싸며 포근히 재워주는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이 말한 단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의 선율은 이해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넘치도록 충분했다. (소설 본문 중에서)


* 1971년에서 1980년 사이에 약 4만 명의 베트남 난민들이 캐나다로 들어왔고 그중의 약 8천 명 정도가 퀘벡주에 정착했다. 보트에 몸을 실어 다른 나라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대략 80만 명으로 보고 있는데, 시도한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만에서 40만 명은 바다에서 갈증과 기아, 풍랑과 해적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으로 300만 명에서 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죽었고, 이후에도 자유를 위해 떠났다가 거센 풍랑에 휘말린 이들에게는 남겨진 이름조차 없다.


영화 'Ru'의 예고편 (official trail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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