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링
1월 말에 진단을 받고 손상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그동안 다년간 혼신을 다하여 전력을 쏟았던 미라클 모닝, 미라클 위크엔즈, 개인적인 장단기 목표 로드맵에 따른 각종 스터디와 학습을 모두 접었다. 수년을 주중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 토·일요일 주말을 촘촘하게 만들어놓은 계획표에 따라 움직여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나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몰아붙였다. 매일 1시간 간격의 시간대별 상세한 시간표를 짜서 일종의 세부 플랜에 따라 움직여왔는데 - 이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서 -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하니 시간이 텅 비어버렸다.
그리고 텅 빈 시간의 공간 속으로 디지털 스크린 타임이 무한정 밀려들어 왔다. 디지털 스크린 타임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TV 등 각종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바라보며 사용하는 시간이다. 이제는 우리의 거의 모든 학습, 업무, 여가, 금융, 모임 등 일상 활동이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대략 디지털 스크린 타임이 하루 일상의 90% 이상을 차지해 버린 것 같다. 당장 나 자신만 하더라도 오프라인 공간에 있어도 어느 틈엔가 자연스럽게 디지털 기기에 접속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년간 영어 학습과 대학원 교과 준비에 디지털 기기를 활용했기에 나름 생산적으로 디지털 스크린 타임을 활용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건강에 무리를 주었던 학습과 교과 준비 등의 활동을 멈추자, 달리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 발생했고 그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각종 온라인 콘텐츠 시청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시력 저하, 두뇌 가열 현상 - 장시간 노출되어 있으면 머리가 후끈해진다 - 수면 부족 등의 부작용이 따라왔다.
이러다가는 눈과 뇌와 정신과 몸이 또 손상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했다.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는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소셜 미디어 등 각종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줄이거나 일정 기간 중단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부지불식간에 디지털 스크린 타임이 일상을 압도적인 점유해 버린 상황과 맞물려,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디지털 디톡스가 꼭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운동이나 여행을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내 경우는 일정 정도 훼손된 건강 회복을 위해 몸에 피로감을 줄 수도 있는 무리한 운동이나 여행을 가는 것이 자칫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대신에, 가벼운 스트레칭과 가까운 숲과 공원을 천천히 걷기 정도로 시간을 채웠다. 하지만, 스트레칭과 걷기만으로 모든 여분의 시간을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해 낸 것이 저널링이었다.
저널링은 글을 통해 나의 생각, 감정, 일상 등을 기록하고 성찰하고 성장하는 것
내가 주목한 것은 "일상의 기록"이나 "기록, 성찰, 성장" 보다는 "나의 생각, 감정"을 적어서 정돈해 본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적어보는 행위가 필요했다. 물론 "일상의 기록"도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뛰어난 저널링이 될 것이다. "기록, 성찰, 성장"은 다시금 목표지향적, 삶의 단계별 발전을 연상시킨다. 많은 이들이 업무이든 개인 생활이든 어떻게든 다음 단계의 상승 계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리더 혹은 인플루엔서들이 그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지점에 있어 결국 상당한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경험했다. 모두가 경쟁적으로 질주하고 앞서가려고 하는 상황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 그러한 것들이 심리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괴로움까지 유발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쉼표, 휴식, 한 박자 쉬어가는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저널링도 도구에 따라서 앱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앱을 사용한다면 다시 디지털 기기에 얽매일 것 같았다. 물론 강박적으로 디지털 기기와 온라인과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나친 편집증적 의식일 수도 있겠다. 다만, 나로서는 적어도 업무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최대한 온라인 기기를 최소로 사용하고 싶어졌다.
손글씨 저널링은 말 그대로 디지털 기기가 아닌 펜이나 연필을 가지고, 종이 노트에 적는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게만 보면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것과 펜으로 쓰는 것과의 차이 정도처럼 보여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는 하다. 어차피 타이핑이든 펜으로 적든 내용은 저널링이므로.
그런데 가끔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가가 의미 있는 차이를 발생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디지털 기기, 앱, 온라인 플랫폼 등을 이용한 저널링을 하다 보면 후끈해진다. 머리가 후끈해진다. 상당 부분 전자 기기가 발산시키는 열과 빛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눈도 뻑뻑해지고 손목도 시큰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널링을 하다가 어느 틈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종 유튜브, 블로그, 포털, 온라인쇼핑 등 다른 온라인 채널들 사이로 숨쉴틈도 없이 검색과 서핑을 하고 있다. "나"를 잊게 만드는 온라인 채널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한 온라인 세계에서 진짜 "나"를 찾으려면 비접속, 비온라인 차원으로 가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고와 행동이 필요할 것 같았다.
손글씨 저널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