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배수구로 큼직한 소리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굳이 커튼을 들춰 보지 않아도 또다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을 참 좋아하지만 이렇게 몇 주 동안이나 오는 것은 영 달갑지 않았다. 침대 옆 벽지에 눌러앉은 곰팡이를 보며 작은 한숨을 쉬고 에어컨을 틀었다. 제습 모드로 변경하고는 나오는 바람을 피하려고 이불을 덮었다.
천장을 보며 입을 뻐끔댔다.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한숨을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내가 마치 요리를 하기 위해 소금물에 담가 둔 바지락처럼 무언가를 해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락이 뻘을 뱉어내는 것처럼 나는 지친 어제를 뱉어냈다.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슬픔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희망찬 오늘을 기약하는 것은 아니었다. 뻘이 물에 부유하는 것처럼 피곤함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문득 붓글씨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붓글씨를 쓸 때 필요한 먹을 갈고 싶었다. 눈을 비비고 책상에 앉아 벼루와 먹을 꺼냈다. 버릴까 말까 항상 고민했지만 나중에 생각하자며 세 번째 서랍에 넣어 둔 것들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 붓글씨를 몇 번 배웠지만 쓰는 방법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먹을 가는 것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정말 가끔 나는 벼루에 먹을 갈았다. 퍼져 나가는 슥슥 소리와 함께 별 일 없는 시간을 보냈다. 먹을 움직이는 것은 꽤나 평화로운 일이었다. 나는 마치 글씨 한 자를 쓰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먹을 열심히 갈았다. 팔이 아파왔고 마음은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마음이 아프고 팔이 편한 것보다는 나았다. 멍하니 먹물을 바라보다가 벼루를 들고 가 물을 변기에 버렸다. 벼루와 먹을 책상 구석에 얹어 두고 대신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