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by 석지호

다른 나라로 떠나기 전에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 나라의 말을 몇 가지 찾아 적어두는 일이다. 포스트잇 위에 발음을 올려 두고 비행기에서 내리며 연습해보고는 한다. 즉흥적인 여행을 사랑하는 편이라 갈 만한 곳도 먹을 만한 것도 찾아보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몇 가지 말은 미리 준비하는 편이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보통 포스트잇 위에는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가 그 나라 말로 써져 있다.


사는 것은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것 위에 많은 것을 쌓는 일이다. 점점 언어를 배워갈수록 그 세 가지 말 외의 것을 더 많이 발음하게 된다. 나는 슬프게도 너무 많은 한국어를 배워버렸고 그래서인지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말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다 내 마음을 알고 있겠거니 하며 무의식적으로 지나치거나. 온갖 쓸데없는 단어들을 붙여 가며 돌려 말하고는 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나는 불쌍하게도 가장 중요한 말을 모국어로 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외국어는 다르다. 나는 몸만 다 커버린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그들의 언어를 흉내 내야 한다. 그래서 삶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말을 거리낌 없이 뱉을 수 있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적으니 짧은 단어가 많은 의미를 안는다. 음식이 맛있는 것도 날씨가 좋은 것도 길을 알게 된 것도 다 고맙다는 말로 표현이 된다. 기차역의 위치를 묻는 것도 당신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미안한 것이 된다. 만남을 보내고 헤어지는 것도 따스하게 껴안는 것도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된 것도 모두 사랑한다는 것이 된다. 그 밖의 말은 사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그 짧은 단어들이 언젠가부터 나의 이상형이 되었다. 술을 마시면 으레 하게 되는 이상형에 대한 물음에 나는 항상 두 가지 답변을 준비해 두곤 했다. 가벼운 자리에선 그 분위기에 맞게 외모나 성격과 같은 답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술에 꽤 취했거나 편한 사람들 앞에선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를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끼한 말을 꺼냈다. 보통은 놀림받는 대답이었지만 가끔은 특이하다며 더 긴 대답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긴 대답을 하고 나면 보통 술에 취했다. 그래서 그다음 날 그 대답을 무엇이라 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마운 것에 고마워하고 미안한 것에 미안해하고 사랑하는 것에 사랑한다고 말하려 노력하고 있다. 다만 노력은 노력일 뿐이었다. 보통 부질없는 자존심과 낯뜨거움과 어색함이 그 말을 혀 끝에서 멈추게 했다. 그럴 때면 후회를 씹으며 집에 가는 길에 배워둔 외국어로 그 말들을 허공에 뿌리곤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얼굴이 가득 빨개진 채로 당신에게 닿지 않는 단어들을 말했다. 말들은 방향 없이 흘러 내 귓바퀴에 도로 앉았다. 그럴 때마다 내일은 꼭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것을 제대로 발음하자고 마음먹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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