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도가 높고 명도가 낮은 날이다. 유달리 그런 하루가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선명한 원색으로 참 쉽게 읽히는 날. 그러면서도 나의 우울이 짙어 금세 그 모든 색들을 짙게 칠해버리는 날. 오늘이 하필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이면 늘 그렇듯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했다. 누군가의 행복을 맞장구치며 웃어주기에는 어딘가 언짢았고. 누군가의 슬픔을 같이 나누어주기에는 무던히도 흔들렸다. 무언가에 공감하는 것은 어느 정도 품이 드는 일이었고,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는 그 삯을 치르기가 영 쉽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친 몇몇의 감정을 무시하려 참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오늘의 할 일을 마치자마자 홀로 있을 곳으로 도피했다.
미리 주문한 연어초밥 세트와 네 캔에 만원 하는 맥주들을 손에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바지춤에서 진동이 울렸다. 늘 같은 진동이었지만 오늘은 영 불안한 리듬이라 느껴졌고. 핸드폰을 손에 들며 그 예상이 맞다는 것에 조금은 놀랐다. 늘 자신이 우울한 날이면 내게 전화를 걸곤 하는 당신이었다. 오늘은 안된다고 무시하기엔 오랜만에 들릴 당신 목소리가 조금은 더 기대가 됐다. 전화를 받아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당신의 우울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역시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오늘을 포기했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몰래 맥주를 마시며 듣는 당신의 이야기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대한 한숨이 주를 이뤘다. 나는 줄곧 이 듣기 싫은 전화를 끊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고. 그랬다간 당신이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시들어 말라비틀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우울한 상상에 전화를 끊지 못했다. 맥주 한 캔을 다 마시고 연어 초밥을 반 정도 먹었을 즘 하소연을 듣는 것이 끝났고 당신은 내 하루가 어땠냐고 물었다. 그 몇 마디에서 귀찮음과 지침과 뭐 그런 너저분한 것들이 보여 나는 언제나 괜찮다는 희미한 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맥주 캔을 몇 번 밟아 구기고는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남은 초밥을 식탁 위에 던지고는 계절 지난 허수아비처럼 무기력하게 침대에 무너졌다. 멍청하게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서 나의 하루를 얘기하고 싶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다. 사실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었다. 상상의 끝은 오늘 하루처럼 영 어두워 핸드폰을 끄고 천장을 바라봤다. 채도는 높고, 명도는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