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선택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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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트램 돌아가면 그냥 집 간다. 빡치네.”화가 난 내가 접두사와 접미사로 욕설을 붙이며 말했다.
“아니 진심? 뭘 타고 있는 거야. 계속 여기 기다리니까 경찰이 나 이상하게 본다.” 현석이 한심한 듯 말했다.
“아니 트램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간다니까? 아니 또 뒤로 가네. 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현석과 만나기로 한 장소를 가려고 트램을 탔다. 특이한 점이라면 한 번 타면 될 트램을 다섯 번이나 탔다는 것이다. 분명히 지도에 그려진 대로 철로를 타고 달리던 트램은 강을 건너더니 그대로 뒤돌아갔다. 처음 두 번은 창가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제정신으로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T1’이라고 쓰인 것도 확인했고 방향도 확실하고 심지어 현지인에게도 물어보고 탔지만 여지없이 트램은 돌아가 출발점으로 복귀했다. ‘노 프라블럼’이라던 현지인에게 따지려고 했지만 온데간데없었다.
여섯 번째 시도에 나는 겨우 뒤로 가지 않는 트램을 탈 수 있었다.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었는데 여섯 번째 트램은 앞으로만 달렸다. 아무리 내 인생이 한 번에 되는 것 없다고 해도 여섯 번은 너무 심하지 않나 싶었다. 남들은 쉽게 도착한다는 ‘돌마바흐체 궁전’은 내게 너무도 먼 곳이었다. 자다가 조식을 놓쳐버린 나와는 다르게 열심히 돌아다닌 현석과 겨우 궁전 앞에서 만났지만 곧바로 헤어졌다. 궁전 입장료가 대충 저녁 세끼정도 할 만한 값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궁전으로 들어갔지만 현석은 고민하더니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카이막’이니 ‘로쿰’이니 ‘바클라바’니 하는 디저트들을 먹으러 가는 것 같았다. 딱 봐도 너무 달아 당뇨병이나 걸릴 것 같은 음식들이었다. 나는 단 음식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내 몸무게는 어째 점점 늘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바다를 끼고 있었다. 바다 바로 옆이라 배를 대는 곳도 있었다. 비가 내려 바다와 만나 원을 만들었다. 수백만 개의 동심원을 보고 있다가 감기가 걸릴 것 같아 궁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는 끝내주게 화려했다. 계급별로 나눠져 있는 방들의 크기와 가구들이 미묘하게 다른 것이 재밌었다. 후궁의 방들은 정실부인의 방과 비교했을 때 묘하게 구석진 곳에 있고 수준이 묘하게 떨어졌다. 그 묘하다는 것이 어째 입에 올려 불만을 표하면 너무 속 좁아 보일 것 같고 가만히 있자면 너무 호구 취급받을 것 같은 그런 수준이었다. 나라면 술탄에게 불만을 말했을지 말았을지 고민하다가 귀족은커녕 화장실에서 똥이나 푸고 있을 노예일 것 같아서 생각을 멈췄다. 이 궁전에 살던 오스만 제국 귀족들은 심심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자! 맛집 찾아놨어!” 발랄한 목소리였다.
유명한 관광지라 그런지 오랜만에 한국어를 들었다. 서너 무리의 한국인들과 마주쳤는데 서로를 ‘음 한국인이네’라는 눈초리로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부 여자 세 명 정으로 구성된 무리였다. 두 명이나 네 명이면 숙소 잡기 편할 텐데 왜 굳이 세명일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궁전 안에 걸린 그림을 구경했다. 술탄의 초상화나 전쟁 중인 튀르키예 군인들의 그림은 꽤 인상적이었지만 머릿속에 남겨진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깊게 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다른 곳을 돌아다닐 때도 여자 세 명으로 된 그룹을 많이 본 것 같았다.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면 두 명이 팔 한 짝씩 잡고 한 명이 상대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에 딱 좋은 구성이라는 결론이 아직까지는 가장 그럴듯하다.
궁전에서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다 현석과 다시 만나 밥을 먹었다. ‘솔트베’라고 하는 SNS에서 유명한 요리사의 음식점이었다. 허세를 부리며 소금을 스테이크에 치는 게 그의 시그니쳐 포즈인 것 같았다. 대체 요즘 유행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햄버거를 시켜 한입 베어 물었다. 튀르키예 물가를 감안하면 확실히 비싼 편이었지만 이 정도 맛이면 허세가 아니라 실력인 것 같았다. 바닥에 흘린 고기 조각까지 긁어먹고 나니 입간판으로 서 있는 ‘솔트베’ 아저씨가 잘생겨 보였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잠깐 자고 부스스 일어나 밤에 샤워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샤워를 해야 한다.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인데 어려서부터 자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부팅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아무리 피곤해도 샤워를 하고 나면 몇 시간 정도는 활기가 돌았다. 나라는 인간은 수중생물에서 진화한 게 틀림없다. 샤워를 한 이유는 새벽에 있을 면접을 위해서였다.
내 연구주제에 대한 발표나 박사과정을 하는 이유 같은 예상되는 질문이 주로 나왔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이나 되는 면접 시간이 심심했는지 어떤 교수들에게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도 받았다.
“살면서 제일 좋아하는 일이 뭐예요? 싫어하는 것은?” 인상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 교수의 물음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예요?” 딱 봐도 심심해 보이는 중년 교수의 질문이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어 서기도 했지만 짧은 영어로 말하자니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받아 놓은 토플 점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차근차근 진득하게 설명했다. 오히려 한정된 단어를 가지고 말을 하니 가려진 수식어가 없어 생각이 명쾌했다. 면접을 끝내고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어는 너무 쓸데없이 많은 것이 분명했다. 아는 단어가 많은 것은 표현하는 것과 어떤 관련도 없었다. 오히려 그 생각과 상상과 감정이 틀릴까 봐 입으로 뱉지 못하게 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알 수가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인간은 결국 자신의 가장 기초적인 감정도 헷갈리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날은 잠을 자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