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Jan 10. 2024

죽음을 위한 자백

0. 프롤로그 


0. 죽음을 위한 자백 

  나는 죽음에 대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곤 했다. 나는 심장이 온전하게 기능을 하지 못하는 미완의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14개월 때 심장 수술을 받았으며 좀 더 건강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했지만 하나님은 지으신 그대로 온전하기를 바라셨던 모양이다. 완치의 개념이 없는 병과 함께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 번 6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요즘 몸에 변화가 있나요? 아직은 괜찮네요”

 의사 선생님에 말은 나를 안심시키기보다 사형선고를 잠시 미뤄주는 것처럼 들렸다. 아직은 괜찮지만 언젠가는 어려워질 거라는 걸 알기에. 그 시기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감히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물어보지 못했다.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질 거예요. 혈관이 터지면 토혈을 하게 될 겁니다'라는 나의 마지막 때가 언제일지를 상상하는 건 나의 무지를 통해 열심히 방어해 왔다. 피를 토하는 건 무섭다기보다 일단 피 맛을 봐야 하는 게 싫으니까. 산소 호흡기를 코에 꼽고 다니는 건 일단 남 보기에 멋지지 않고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래서 좀 더 숨 가쁘게 살려했는지도 몰랐다. 의사 선생님에 대답이 바뀌기 전에, 산소호흡기를 꼽기 전에 얼른 하루라도 빨리 뭐라도 해야 했다. 일단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고 유명해져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해야지. 그때는 산소호흡기를 꼽고 나타나도 사람들이 멋지다고 소리쳐 주지 않을까. 가장 유명한 토크쇼에 나와서 “전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이렇게나 멋지게 성공했답니다 하하”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지 않을까. 애써 나의 삶을 그렇게 위로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무서워서 나보다 나이기를 바라는 무언가를 열심히 쫓으며 사랑했다.


  작고 느린 나의 몸뚱이가 남들처럼 빠르게 구르기를 바랐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강하게, 좀 더 세게. 나의 작고 여린 몸은 매 번 채찍질만 해대는 나에게 부서지고 망가졌으며 쪼그라들었다. 쓰러지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넘어지다가 다치기를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학대당했다. 나의 느린 성정은 이해받지 못한 채 어리숙한 성장에만 머물렀다.


1. 나무늘보보다 느린 사람

  학창 시절,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무늘보보다 느린 사람’으로 불렸다.

“나무늘보도 똥 싸러 갈 때는 빠르데! 근데 넌 항상 느려. 나무늘보보다 느린 게 분명해!” 나의 느린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빨리하려고 해도 나는 학교에서 가장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으며,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체육시간에 나랑 짝꿍이 된 친구가 짝을 바꿔도 되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이번 시험에서 꼭 A+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난 선생님과 짝꿍이 되었다. 친구들과 매일 하는 얼음땡 놀이에선 늘 ‘깍두기’ 역할을 담당했다. 뛰는 게 너무 느려서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깍두기’의 역할은 뻘쭘하게 구경하며 응원이라도 하거나 가끔은 친구들을 쫓아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역할이었다. 놀이터에서는 주로 친구들 근처에 털썩 앉아서 모래성을 만들었다. 툭하면 사라질 형태를 오래도록 쌓아 올렸다. 단단하지 않은 모래들이 엉키고 끈끈해질 때까지 두드리고 짓누르며 쌓고 쌓아 올리며 그 안에 머물고자 했다.


  비록 얼음땡에서는 ‘깍두기’밖에 할 수 없었지만, 체육시간에 나와 짝꿍을 해주는 친구는 없었지만 나에게도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었다. 오래오래 앉아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었다.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었다. 걷는 것조차 숨 가쁜 나에게는 지나가는 말보다 꾹꾹 눌러 담는 글이 좋았으며, 흘러가는 것보단 멈춰있는 글자들이 좋았다. 가만히 앉아서 바다 저 끝까지 모험을 할 수 있는 텔레비전 속 만화가 좋았다.


  조용히 글자를 읽어내리는 행위가, 천천히 써 내려가는 행위가 밖에서 얼음땡을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미숙했기에 알지 못했다. 몸으로 부딪치고 쟁취해 가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나를 부정했듯이, 느린 성정을 가진 것들의 가치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2. 천국의 계단

  돈보다 시간이 귀해진 분초사회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부정하며 성장했다. 빠르게 적응하고, 쉽게 끊어내고, 치열하게 쟁취하는 것. 그 가치가 이 세상의 유일한 성공과 행복의 지름길이라 확신했다. 모든 것을 효율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귀한 인연들을 필요성의 정도로 구분하여 쳐냈으며, 취업 후 돈을 오늘보다 내일 더 벌기 위해 살았다. 24시간을 멈추지 않고 뛰기를 반복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5년 차가 되었을 때 난 이룬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학창 시절 유일하게 나를 즐겁게 했던 읽고 쓰는 것을 멀리하게 되었으며, 나무늘보보다 느린 나는 오랫동안 뛸 수 없음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성공에 대한 강박은 몸의 경고 신호도 무시한 채 살았고 끝내 부풀다가 한 번에 팡하고 터져 쪼그라드는 풍선처럼 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열심히 쌓았던 모래성처럼 톡 하고 치자 와르르 무너졌다.


  어렸을 때, 잔병치례 때문에 가끔은 무서운 수술방에 들어가야만 했다. 차가운 수술방에 누워서 천장을 쳐다볼 때면 마지막 기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곤 했다. 자신이 없었기에 그랬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던 성경대로 살지 않았던 내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천국을 가도 될지 말이다. 그래서 항상 나의 질문은 “저 천국 가도 되나요?”라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나 난 다시 차가운 수술방에 들어섰다. 폭 하고 터진 풍선 같은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딱히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 없게 물어야만 했다. “저 천국 갈 수 있나요?”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시간에도 나의 물음이 바뀌지 않았음에 부끄러웠다. 짧은 입원 생활을 마치고 거의 한 달여간을 집에서 누워서 보냈다.


   돈을 벌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으며, 생각도 하지 않는 비로소 무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숨만 쉬는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도 물살이 흘러도 난 한자리에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나의 속도대로 살기 시작했다. 한 달을 누워만 있다가, 한 달을 읽기만 했다. 그리고 한 달을 쓰기만 했다. 그렇게 천천히 느리게 나의 속도로 다시금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나의 가치를.


“나는 죽어서도 쉬지 못했다. 이유를 찾느라. 인과관계의 인에 메달리느라 죽음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빈 괄호로 두고 싶다”  <제 꿈을 꾸세요, 김멜라> 中


3. 느림의 가치

  나는 죽음에 대해 여전히 자주 생각하곤 한다. 숨이 가쁠 때에도, 심한 두통이 올 때에도, 찬기가 도는 손발을 볼 때에도 늘 그렇다. 나는 엄마의 뱃속에 있던 시절을 알지 못한다. 태어나 처음 맛보았던 공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첫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는지, 나의 첫 얼굴은 얼마나 쪼글쪼글했는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나의 시작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겠지만, 나의 끝은 또렷하고 명확하기를 바란다. 죽음을 오늘도 내일도 생각하는 일은 죽음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잘하기 위해서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빈 괄호로 두고 싶지 않다. 빈 괄호를 채우기를 원한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는 일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모든 게 느린 사람이다. 어렸을 때 소풍을 가면 가장 끝자락에서 쫓아가는 사람이었으며, 점심시간에 학식을 먹을 때면 가장 맛있는 돈가스를 친구한테 줘도 그 친구보다 더 느리게 먹는 사람이었으며, 책 한 권을 붙잡으면 일주일 내내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사람이었다. 씻으러 한 번 들어가면 1시간은 지나야 다 끝낼 수 있으며, 카페에서 음료를 시키면 음료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얼음 녹는 속도가 빠를 정도며, 말로 툭하고 던지는 것보다 글로 꾹꾹 눌러 담아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하면 오랫동안 곱씹어 보며, 한 가지 질문을 오래도록 품으며 사색하는 사람이며, 아이돌보다 느린 템포의 인디 음악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토록 느린 나를 먼저 사랑하는 과정은 나의 끝을 또렷하고 명확하게 만드는 시작이 될 것이다. 이제 시작해보려 한다. 느린 성정을 가진 나의 가치를 살펴보고 사랑하는 일을, 그리고 그 너머에 나와 같은 존재를 이해하고 포옹하는 일을.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의 존재가 가치 있다 말할 수 있게 되기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