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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08. 2024

10퍼센트 글쓰기

그런 날이 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일단, 오늘이 아직도 평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욕이 사라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이 아니다. (아니 영향이 있을 수는 있겠다) 아마도 그것보다는 의욕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첫 스케줄을 '운동'으로 넣은 것이 판단 미스였던 것 같다. 요즘 하기 싫은 스케줄을 젤 먼저 해치우고 싶어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니 남은 스케줄에 대한 부담이 사라져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으나 문제는 가끔 이렇게 컨디션 난조에는 오히려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이 그런 운이 나쁜 날이었다)




결국, 무리한 운동으로 오전 내내 골골거리며 누워 있었다. 나에게 있어 골골대는 순간보다 더 스트레스가 되는 건 계획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침대에 누워 끙끙대는 꼴이라니.. (비참하다) 그래도 좀 쉬니 괜찮아져서 오후에는 책상에 앉아 '스케줄대로' 밀린 업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한 참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응? 누구지?)

등록되지 않은 번호. 그러나 왠지 아는 사람일 것 같은 느낌. 결국 받았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혜야. 잠깐 전화되니? 아. 오빠 웬일이세요? (이 오빠가 나에게 전화를 하다니) 정적이 흐르다 하는 말은 별거 아니지만 나를 다시금 힘 빠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나 운동모임 나갈라고

거의 4달 동안 꾸준히 사모임으로 운영하고 있는 운동모임 회원이 나간다는 안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것도 어제 막 운동모임 두 번째 회식을 끝낸 후였다. 그리고 그는 벌써 네 번째 탈퇴 선언 회원이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몇 주 사이로 회원들이 쑥쑥 빠지고 있었다) 주마등처럼 어제 회원들을 붙잡아 보겠다고 애썼던 나의 노력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 쪽팔리네. 


안 되겠다. 오늘은 진짜 스위치를 꺼야겠다. 결국, 나는 모든 작업을 종료한 채 거실로 나갔다. 이런 날 무슨 글을 쓴다고 (참내) 그런 날이 있으니까. 뭘 해도 안되고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는 날. 그러니 그런 날은 방어태세로 바꾸고 나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 난 전투식량을 챙기듯 간식 창고에서 한가득 과자를 가져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 평소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던 코미디 영화를 플레이했다. 평소 또 참고 있던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원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와그작. 오늘은 도망가는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한 10분쯤 봤을까. 아 하필이면 주인공이 작가야. 그런데 또 하필이면 두려움 때문에 글을 한 줄도 못쓰는 안타까운 상황이잖아? (이거 코미디 맞아?) 그때였다. 유튜브 광고가 나오면서 수영황제 펠프스가 금메달을 주렁주렁 맨 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매일 수영을 했어요.
매일 100%를 채울 필요 없어요.
0보다 10%라도 나아가는 게 중요하죠(하하)


다시 플레이된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전히 책상에 앉아 고심을 이어 나갔다. 서재에는 담배가 쌓이고 이마에 주름이 깊어져갔다. 나는 먹던 과자가 짭조름해져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휴지로 입과 손을 닦았다. 주인공이 애쓰며 글을 쓰는 걸 계속 봐서 그런가. 아니면 펠프스가 자꾸 10%로만 해도 된다고 해서 그런가. 갑자기 지금 이 순간에 흥미가 사라지고 손가락을 움직여 글이 쓰고 싶어졌다. (오늘 0%인데..) 그냥 오늘 있었던 속상한 순간을 글로 남겨놓기만 해도 10%는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글 쓸 준비를 했다. 


난 역시 이러나저러나 글을 써야 하나 봐. 거실에서는 여전히 영화 속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처럼 의자에 앉아 스탠드 조명을 켜고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듯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술술 나온다) 띠리링. 1시간 종료를 알리는 타이머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쓰다 보니 탄력을 받아 두 시간을 써버렸다. (어머 이게 써지네) 글쓰기와 감정을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글쓰기를 습관처럼 반복할 수 있게 된 것에 하루종일 안 좋았던 기분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은 7년 전, 한 작품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작가였다. 그러나 그 뒤로 후속작품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맴돌기만 했던 것이다. 동료 작가는 그와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팩폭을 날린다. 

"너 그거 못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거야.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변덕이 심한 나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는 않았지만 그 장면을 가끔가다 떠올린다. (금메달을 멘 펠프스와 함께) 오늘처럼 글쓰기가 나에게 부담이 되는 날에는 그래서 그냥 하루쯤은 넘길까 싶은 날에는 그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본다.


10퍼센트 글쓰기라도 해보자. 


오늘 이 글도 10퍼센트 글쓰기로 탄생시켰으니 더 좋은 것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매일 스스로를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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