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작가로 살고 있지만 그리고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작가로 불러주지만 여전히 작가로서 쓸모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쓸모란, 쓰임새를 말한다. 즉, 누군가 아직 나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막 데뷔한 작가에게 누군가 원고를 청탁하는 일은 당연지사 없는 게 맞다. 그러니 난 아직 쓰임새가 없는 작가다. 내가 작가가 되기 전, 스스로 인생 방향을 찾고자 썼던 나의 첫 작품인 <느려도 게으르지 않아요> 브런치 북을 쓸 때 적었던 문구가 있다.
나의 쓰임을 찾기 위한 씀의 과정을 기록합니다. (참고로 현재는 작가 프로필에 적혀있다)
그때 당시 난 마케터에서 작가로 전향을 고민하던 시점이었고 저 때 당시 '쓰임'은 말 그대로 '마케터'와 '작가' 중 어떤 직업으로 쓰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작가로 데뷔한 후에도 프로필 설명을 더 추가했을 뿐 저 말을 지우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난 여전히 '쓰임'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항상 게임을 할 때 캐릭터를 고르는 일에 가장 신중했다. 늘 무기로 활을 고를지 총을 고를지 그것도 아니면 마법을 고를지 양자택일이 없는 선택은 날 힘들게 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게 그 캐릭터를 얼마나 잘 활용해서 좋은 전사가 되느냐였다. 캐릭터가 정해지면 열심히 노동을 해 아이템을 얻거나 장비를 구매한다. 그런 후 어느 정도 에너지와 장비가 생기면 전투에 나가 싸워 승리한 후 레벨업을 한다. 게임원리는 아주 간단하지만 중요한 건 '스스로'이 모든 걸 애써 해내야 하는 것이다.
난 게임 못하기로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인데 (내 주변 사람은 다 안다) 가장 큰 이유는 저 간단한 원리를 반복하는 걸 무진장 귀찮아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만 잔뜩 있다면 게임회사는 망할게 분명하다. 아무리 난이도를 쉽게 만들어도 나 같은 사람은 캐릭터를 일단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것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난 절대 죽어다 깨어나도 게임에서 승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난 작가라는 캐릭터를 30년 만에 겨우 골랐고 이제 아이템을 모을 차례가 되었다. 레벨 1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면 최대한 많이 아이템을 줍는 행위다.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고 희귀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 흔한 아이템을 버릴 필요도 없으며 누군가와 딜을 할 필요도 없다. 일단 무조건 움직이며 줍줍 하는 것이 레벨 1단계에 맞는 적당한 행위다. 게임 개발자는 유저들이 게임에 최대한 흥미를 붙이기 위해 처음에는 아이템을 마구잡이로 막 뿌린다. (그래봤자 가장 흔한 아이템이지만) 난 지금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아이템을 줍기만 하면 된다. 나의 첫 번째 쓰임을 찾기 위한 일이다.
아이템 줍는 것도 귀찮다고?
작가에게 아이템은 매일 써내는 일정한 양의 글이다. 그 소스가 나중에 직접 원고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걸 통해 새로운 기획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소스와 결합해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작가도 실은 아이템빨이다. 그래서 일단 그 아이템을 매일매일 줍기로 스스로 결심했으나 중요한 건 난이도와 상관없이 인간은 '부지런히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에 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또한 자연에 속한 하나의 유기체로서 날씨와 감정과 호르몬과 환경 변화에 아주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이 따뜻하면 늘어지고 날이 추우면 움츠러들어서 '아이템 줍기'라는 반복 행위가 썩 내키지 않아 진다. 가끔은 대인관계에서 상처받는 날도 생기고 또 어떤 날은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기도 찾아온다. 고로 인간에게 매일 똑같은 행위를 하라는 건 지나가던 길고양이에게 매일 똑같은 시간에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와 야옹하고 세 번 울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것)
이런 인간적인 유저들이 꾸준히 아이템 줍는 활동을 하게끔 하기 위해 게임회사에서는 쉴 새 없이 푸시를 한다. 이벤트를 열고 선물도 주고 가끔은 달콤한 말로 유혹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건 '유통기한'을 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애써 키워둔 혹은 애써 골라둔 캐릭터가 유통기한이 다 돼서 곧 사라진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애정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유통기한을 연장하기 위한 미션은 클리어하는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그냥 나처럼 게으른 유저를 위해 하나 생각해 본 아이디어다.
얼마 전, 어느 소설가가 쓴 작가 에세이를 읽었다. 직장인과 작가를 겸업하고 있는 그는 게으름을 이겨낸 상위 10% 안에 드는 부지런한 유저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책에서 나와 같이 게으른 유저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마감을 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줘라'
그렇다. 아직 누군가가 나에게 마감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스스로 주면 되는 것이다. 난 무릎을 탁 한 번 치고 오랫동안 외면했던 '아이템 줍기'를 다시 상기시키며 스스로 마감을 어떻게 줄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소설가님은 작가에게 있어 '마감'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그렇기에 신인 작가들은 누군가 마감을 주기 전부터 스스로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감을 스스로 지켜내는 연습을 말이다.
난 고심 끝에 매일 쓰고 읽는 행위에 더불어 남은 두 달안에 에세이 출간 기획서와 1장까지 완성해 보겠다는 마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마감이 생기니 마음이 무겁다) 이 날 저녁, 난 아주 큰 대왕문어와 싸우는 꿈을 꿨다. 아마도 아이템을 열심히 모아 전투에 나간 모양이다. (첫 상대부터 너무 거대한데) 힘겨운 전투 끝에 결과는 보지 못하고 깼지만 난 그날을 계기로 대왕문어를 생각하며 매일 전투적으로 글쓰기에 돌입했다. 12월 31일이 되면 나에게 예약 메시지를 전송해야겠다.
[작가님 마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