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다.
애정을 가졌던 첫 번째 가게를 정리한 후 나는 또다시 깊은 상실감에 빠졌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하루도 온전히 쉬지 않았던 일상에 언제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공백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공백기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를 어떻게든 쉬게 만들었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항상 나보다 먼저 도착할 곳을 향해있던 나침반은 이젠 방향을 잃어 허우적 되고 있었고 기어코 나는 막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었다. 가게를 그만둔 건 4월 중순쯤으로 잔인한 계절이었다. 모든 것들이 싱그럽게 피어오르고, 각종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순간인 그해 봄을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지나가고만 싶었다.
쉬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이었던 나는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결국 어렸을 적 방학만 되면 냄비뚜껑을 덮어 따라 그렸던 원형모양의 계획표를 짜기로 했다. 24시간을 시간별대로 동그란 원형 안에 그어놓고 실행할 수 있는 하찮은 계획들을 적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아침 먹기, 외출하기 등 하루를 적어놓은 계획표 대로만 살면 당분간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일상이 무료했던 나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가는 계획을 짰고 그 결과 매일 짧은 외출이라도 반드시 해야만 했다. 외출은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만 나를 안내했다. 서점, 영화관, 대형쇼핑몰, 도서관, 발이 편한 평지만 있는 공원 등 두어 달을 그런 곳만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5월이 가고 6월이 갔을 때쯤, 나는 인터넷을 뒤져 내일 배움 카드를 신청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제발 몇 달 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지만 나는 몸이 근질거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평생 장사를 해온 사람은 단 하루만 쉬어도 몸에 병이 나기 일쑤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던 깨진 독 같던 나의 공허한 마음은 어느새 새로운 배움으로 인하여 나날이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관심이 있던 커피와 꽃을 전문적으로 배우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면서 할머니의 말버릇 중의 하나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끝이 없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 알게 되었다.
오타쿠 기질이 있던 나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커피와 꽃을 탐구했고 그 결과 바리스타 자격증과 화훼장식 기능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에서 우유 거품으로 하트를 만드는 라테아트 시험을 치렀었는데 이 시험에 관건은 우유 스팀 피처에 공기 주입을 충분히 해주는 것이었다. 우유 거품이 충분히 생기지 않으면 하트를 만들기가 어려웠고 성격이 급한 나는 번번이 하트를 동그라미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우유를 붓는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여 마침내 라테 아트를 하트로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과정을 통해 나는 결과 보다도 과정에서 큰 기쁨을 얻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손에 쥔 나는 자신감이 붙었고, 또 다른 도전인 꽃을 전문적으로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나름 손재주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꽃을 처음 만난 첫날에 그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선생님이 내어준 과제를 반에서 제일 못했던 것이다. 다급한 성격과 섬세하지 못한 손짓에 꽃들이 짓무르고 꺾이는 것을 보며 꽃을 대하는 내내 어려움을 난 겪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잘만 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말 그대로 엉망 그 자체였다.
똑같이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꽃다발들의 모양은 결국 내 취향이 아니었다. 배움에 있어서 취향이란 게 나에게는 제일 중요했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었다. 결국 고급반까지 수강하려고 마음먹었던 꽃수업을 도중에 그만두고 배운 게 아까워 자격증이나 따보자 라는 생각으로 화훼장식기능사에 도전하게 되었다. 화훼장식 기능사도 꽃수업과 같이 똑같은 것을 배우고 실행하는 과정이었지만 매 순간마다 사람에 의해 달라지는 작품들에 있어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꽃을 통해서 나는 내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때에 큰 재미를 느낀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화훼장식 기능사를 따고 묘한 성취감에 사로잡힌 나는 문득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미술선생님이 장래희망에 관한 만들기를 숙제로 내준 적이 있었다. 만들기의 재료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었는데 난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었다. 열일곱의 숙제는 서른다섯이 되기까지 나에게 제일 재미있는 과제로 남아있다. 나는 미술 선생님의 숙제를 받아 들자마자 신이 나서 부천역 화방으로 달려갔고, 머리에서 솟구치는 아이디어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때 나의 장래희망은 요리사였는데 까만 하드보드지와 수수깡으로 프라이팬을 만든 다음 더 두꺼운 하드보지로 가스레인지를 만들었다. 그 후에는 칼라 고무판 등으로 프라이팬에 올릴 요리를 만들었다. 갈색 고무판으로는 스테이크를 흰색과 노란색 고무판으로는 계란프라이를 만들었다. 내가 봐도 잘 만든 숙제를 보며 나는 미술 시간만이 오기를 기다렸고 결국 최고점인 에이플러스를 받았다. 많은 친구들 앞에서 칭찬이란 것을 처음 받은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창작에 목말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사실 난 가게를 하면서도 매 순간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각종 자재로 액세서리를 만들고 진열된 물건들의 디피를 새롭게 바꿔가며 매일을 새롭게 단장하곤 했다. 가게를 정리하고 보낸 시간은 겉으로는 조용히 흘러간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거대한 토네이에 휩싸인 집처럼 소용돌이쳤다. 나는 나와 끊임없이 대화했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드디어 내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 되어줄 글쓰기를 만나게 되었다. 글 안에서의 나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나의 이야기를 쓰지만 완전한 타인이 되어서도 글을 쓸 수도 있었다. 정해진 과제가 없는 모든 것이 새 태어날 수 있는 그곳이 곧 글쓰기의 세계였다.
*창조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
*창작
방안이나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
*창의력
새로운 생각이나 개념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있던 생각이나 개념들을 조합하여 새로이 생각해 내는 특성이다. 창조성이라고도 하며 이에 관한 능력을 창조력이라고 한다. 창의력에 대한 다른 개념은 '이을 수 없는 점을 잇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