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의 달리기
정직원 퇴사 이후 간호대를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마다 정신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근무 시간이 많이 줄어든 만큼 자주 보았던 외래 환자들이 그리웠다.
데스크에 앉아 정신과 간호조무사로 입사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난 2학년 간호대생이 되어있었다. 수많은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환자는 다름 아닌 ‘나’를 기억해 주는 환자였다. 어느 날이었다. 네가 처음 입사하던 때부터 계셨던 환자분이 진료를 마치고 데스크 앞에서 수납을 할 때였다.
“요즘 자주 안보이시네요.”
“아, 네 제가 요즘은 아르바이트로 근무하고 있거든요.”
이윽고 환자분의 눈에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데스크에서 울리는 전화 때문에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결국, 간호대를 오게 된 이유는 ‘몰라서’였기 때문이다. 항상 네 머릿속에는 궁금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래서 책을 찾아보거나 스스로 조제되고 있는 약들을 리스트업 하여 동료들에게 인수인계하거나 스스로 공부해보기도 했는데, 이 약들이 언제 쓰이는 건지, 네가 말하고 안내하는 것들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온통 답답한 것 투성이었다. 제일 궁금했던 것은 자동 혈압계를 상완동맥에 위치시켜 놓고 왜 쟤야 하는지 왜 다른 부위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상완동맥인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한 번은 나를 당황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
정신과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날은 직원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혈압계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커프가 상완동맥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에 위치되어 있어서 혈압계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환자 앞에서 화를 내는 건 동료와 환자에게 모두 득이 될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고, 조용히 위치를 바로 잡아주고 다시 원래 일하던 자리로 돌아와 네 일을 마쳤다.
이제는 신입사원이 아닌 직급이 올라가고 내가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일보다는 가르쳐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충 알아서는 안되고 제대로 알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특히나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은 더욱이 그렇다. 겉보기에는 정신과가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평온한 속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함, 무게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정신과에서 3년 넘게 근무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 환자가 제일 처음 어렵게 마음의 문을 열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직원’이다. 난 그저 응대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곳까지 올 수 있도록 환자들의 마음을 다독일 줄도 위로할 줄도 아는 능력이 필요했음을 간호대생이 되어 공부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간호대에 와서야 정말로 ‘배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드레싱세트’에 멸균하기 위해 사용되는 EO가스였다. 정신과의원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하기 전 국립암센터에서도 약 3개월간 골연부외래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드레싱세트가 이리도 위험한 건지 몰랐다. 멸균처리를 위해서는 EO가스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드레싱세트를 사용하기 위해 면포를 여는 과정에서 이 가스를 흡입하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네가 얼마나 네 스스로에게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국 버펄로로 떠나기 전 적십자에서 8시간 진행되는 응급교육훈련을 받았다. 경기청년사다리에서 응급교육으로 진행한 심폐소생술 교육은 실습이 아닌 구조대원의 강연으로 끝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7만 원의 강습료를 지불하고 ‘네 돈 내 교육’으로 교육을 들으러 갔다. 직접 해본 심폐소생술은 정말 힘이 드는 일이었다. 왼손이 얼얼할 정도로 아프고 저릴 때까지 했다. 본격적인 응급교육 전 강사님께서 왜 이 교육을 배워야 하는지 수강생들에게 물어보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대답은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상외에 답을 듣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다. 타인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살리기 위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배운다’는 것은 곧 ‘나’를 살리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 안에서 10여 년 간 넘게 획일화된 공부를 해온 나에게 공부는 늘 ‘왜 해야 하는 거지?’라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답을 이제는 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다.
배우지 못한 한은 정말 크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의사 선생님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답답했던 처방전 약어들을 보면서 이제는 이게 뭔지 알게 된 이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Prn.
Tid.
Pt.
etc...
알아야
나와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