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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y 24. 2020

세계 문학- 나보꼬프, 롤리타

위대한 다언어 작가, 망명 예술인

롤리타. 이 작품은 들을 때와 읽을 때 여러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블라지미르 나보꼬프의 롤리타 원작은 1955년 미국에서 영어로 처음 출판되었다. 미국 시민권을 얻고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며 곤충학 관련 출장 여행을 하는 도중에도 이 작품을 공을 들여서 썼다. 롤리타는 영어 원본에도 그의 모국어인 러시아어의 음성 흔적이 여기저기 느껴지는 작품이다. 작가가 이 소설에는 도덕성은 없다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출판되자마자 내용의 부적절함 때문인지 비판도 많이 받고, 금서로 지정되는 등 문제작으로 급부상하며 미국과 유럽 양 대륙에서 모두 극과 극의 반응과 피 튀기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등장인물과 상황을 바로 앞에서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시각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또한 롤리타는 언어학적으로도 참 재미있는 시도를 많이 한 작품이다.

9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러시아 작가 아나똘리 킴 선생님께서 내가 다니던 대학원에 초빙되셔서 현대 노문학 강의를 한 학기 하셨는데 함께 나보꼬프의 «Весна в Фиальте»등 단편 몇 작품을 원문으로 읽었다. 그리고 여름 방학에 석사논문자료를 모으러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다. 그때 한 서점에서 나보꼬프 본인이 영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했다는 롤리타 러시아 본을 구해서 처음 읽었다. 

그 후에 1997년작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고 영상의 아름다움과 연기를 통해 전해지는 아련함과 아픔이 기억에 맴돌았다.

얼마 안 지나서 대학원생들을 아끼셨던 문학 교수님께서 연극 초대권을 받으셨다고 나와 몇몇 인문학 공부하던 사람을 초대하셔서 우리는 함께 대학로 소극장에 갔다. 이 작품을 연극무대에 올리면서 어떻게 해석했을까? 연극화하려는 시도와 공연 의도가 과감한 실험이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연극 관람 후 우리는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이런 것일까 하고 느꼈다. 우리는 착잡해진 마음을 달래며 식당에 가서 다들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밥만 입에 꾸역꾸역 떠 넣으면서 한숨만 쉬다 헤어졌다. 교수님께서 언짢아하시던 생각도 난다. 당시 소련 붕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문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안 되어서 우리나라 배우들이 단순히 줄거리가 아니라 원작의 미적인 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우리말 자료가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당시와 지금 우리나라 공연예술 토양과 수준은 천지 차이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 후 상뜨 뻬쩨르부르크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언어학 박사논문을 쓰면서 필요하던 구문을 코르푸스로 수집, 분석하는 과정에 그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게 되었다. 그때마다 구문 수집을 잠시 멈추고 글에 빨려 들어가며 나보꼬프는 천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감동하였다. 

블라지미르는 상뜨 뻬쩨르부르크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자라서 이미 러시아에서 자랐고 청소년기에 이미 영어를 포함 3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10월 혁명 이후 잠시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플에 살다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동물학과 슬라브-로마 문학을 전공했는데 수석을 할 정도였으므로 그의 언어적 유창함이나 재능에 의구심을 제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해외에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에게 언어의 문제는 외국어를 잘하냐 못하냐 같은 저차원적이고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가와 작품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하지만, 작가의 철학과 경험이 아예 투영되지 않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를 떠나 타국에서 모국어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창작 활동하며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전달하기 어렵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이런 상황은 다양한 창조적 실험을 하며 표현을 극대화할 기회라고 생각했을까? 

언어는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프리즘이어서 같은 줄거리라도 어떤 프리즘을 통해 표현하고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참 다르다.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두 언어의 단어에 같은 의미가 있어도 의미역과 결이 완전히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장의 통사 의미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와 독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언어 외적 의미와 연상되는 것도 다르다. 
작가로서 나보꼬프는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을 오역할까 봐 두려웠을까? 아니면 삼개국어를 능통하게 하는 나보꼬프는 한 언어로 창작을 하고 나면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표현과 메시지를 다 담아내지 못한 듯해서 아쉬웠을까? 그는 롤리타를 포함 자신의 소설을 영어로 출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러시아어로 번역을 했다. 또 어떤 단편들은 러시아어로 쓴 후 스스로 영어로 번역을 했다.
롤리타와 관련 "이 작품에는 도덕성은 없다"라고 밝혔듯이 나보꼬프는 작가의 역할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훈계를 하거나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특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미적인 즐거움을 느끼기를 바랐다. 
롤리타 역시 단순하게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행동과 소설의 겉 의미에만 초점을 맞춰 읽으면 도덕적 손가락질을 참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오래 고심한 후 선택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언어 표현, 낭독 시 더 잘 느껴지는 글의 청각적 아름다움, 탁월한 묘사, 글을 통한 시각화, 작품의 구조, 기호 등이 참 뛰어나다. 그가 동물학을 전공했고 곤충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 역시 그의 관찰력, 작품에서 자주 구현된 다채로운 관점에서의 서술 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 롤리타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화자, 기억의 문제, 시공간과 여러 시점이 어우러지고, 묘사가 너무 생생해서 이것이 혹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 허구 속에 담긴 진정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더 나아가 롤리타에 등장하는 각각 인물의 상징성을 생각하며  읽는다면 글 읽기가 더 재미있어진다.

부인처럼 아꼈던 롤리타는 외설 영상물 제작자와 눈이 맞아 훔베르트를 배신하고 도망간 후,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얼마 후 훔베르트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오랜만에 만난 롤리타는 나이가 들어 요정 같은 외모를 잃었으나  훔베르트의 변함없는 마음을 느낀다. 훔베르트의 롤리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다시 돌아가거나 경험할 수 없게 된 옛일에 대한 그리움, 자신이 지향하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열망, 그리고 타국에서 창작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렵게 된 모국어인 러시아어에 대한 애절한 나보꼬프의 마음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돌아갈 수 없는 시절과 장소에 대해 애틋함과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는 본능이고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특성인 것 같다. 뇌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거나 스트레스, 혹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외상을 입어 뇌 기능 일부가 손상되면 최근의 기억부터 흐려진다고 한다. 먼 과거의 기억이 더 깊고 선명하게 남는다고 한다. 치매 중증 환자의 경우에도 최근의 일들은 잊어버리고 결국은 어린 시절의 일들, 아주 가까운 가족들에 대한 기억만 남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거나 외상을 입지 않아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사는 지금-여기가 아무리 거의 완벽한 신세계일지라도 옛일에 대한 그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진다. 어떤 이는 생존의 방법으로 머릿속에서 과거의 현실을 왜곡하고 미화해서 저장한 기억이 현재보다 훨씬 큰 위안을 주기에 그 기억을 붙잡으며 살아간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롤리타가 출판되기 약 10년 전에 이미 나보꼬프에게 시민권을 줬다. 미국에서 출판된 문학사 관련 문헌 중 아직도 나보꼬프를 위대한 미국 작가라고만 소개한 책도 꽤 있다. 하지만 나보꼬프는 유럽보다도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이 맞지 않아서였을까? 그는 롤리타의 상업적 성공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미국을 떠나 유럽, 스위스로 돌아가서 남은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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