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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Aug 31. 2021

진행은 발생 중

동사의 역할과 존재 이유

진행이 거침없이 진행하고 있다. 문장에서 진행이 빠지면 섭섭하다. 진행은 동사가 해야 할 역할을 빼앗아 동사를 명사로 둔갑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오타 수정해 주세요'가 '오타 수정 진행해 주세요'가 된다. 수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동이기에 딱히 틀린 문장은 아니나 남용할수록 남용하는 범위가 한도 없이 넓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그럼 참석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석에 '하다'만 붙이면 동사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된다. 특정 장소에 내 모습을 드러내는 행위를 굳이 진행할 필요는 전혀 없다.


“소중한 시력은 노안이 진행됩니다.”

한동안 지하철을 도배하던 광고다. 노안이 진행될 수는 있으나 주어인 소중한 시력과 뒤따르는 노안이 진행된다는 문장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문장을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든 승객이 매일 읽는다. 어린 아이도 읽고 어른들도 읽는다. 많이 볼수록 익숙해지고 익숙해질수록 거부감은 무뎌진다. 그리고 어느새 비슷한 문장을 사용하고 쓰게 된다. 이것이 비극이다.

진행은 동사의 역할을 빼앗을 뿐 아니라 명사 뒤에 쓸데없이 따라 붙기도 한다. '전세 가능합니다' 보다 '전세 진행 가능합니다'가 훨씬 많이 보인다. 여기에서 조금 더 진화하면,'출석 체크 했습니다'가 '출석 체크 진행 완료했습니다.'라는 어마어마하게 긴 문장이 되기도 한다.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더 나은 서비스 제공을 위해 홈페이지 점검 작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한 웹사이트를 방문했다가 본 안내문이다. '홈페이지를 점검하고 있습니다.'도 충분하고'홈페이지 점검 작업 중입니다.'도 충분하다. 그런데 ‘홈페이지 점검 작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라고 찢어진 종이 풀칠해 붙이듯 단어들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진행 못지않게 남용되는 또 다른 단어는 발생이다. 발생 역시 진행과 마찬가지로 동사 자체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면 굳이 쓰지 않아도 되지만 틈만 보이면 문장 속에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한다.   

‘휴지를 변기에 넣을시 변기가 막히는 현상이 자주 발생합니다.’

굳이 이렇게 쓰지 않아도 훨씬 간결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다. '휴지를 변기에 넣을시 변기가 자주 막힙니다.' 의미도 더욱 명확하고 한 줄 안에 끝나니 종이와 잉크도 절약된다. 복잡하고 어렵게 말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문자 메시지 안에서, 이메일 안에서, 입 안에서, 진행은 발생 중이며 진화 중이다. 나는 그 문장들을 가지치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진행의 발생에 익숙해지려 애쓴다.


동사의 자리가 자꾸 밀려나고 있다. 표현하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동사에게 믿고 맡기자. 그게 동사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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